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아니, 어쩌면 내가 눈감는 그 순간까지 잊지 못할 하나의 줄을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눈감는 날, 선명히 그 줄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선하고 아름답게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죽음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 생애에서 만난 그 어떤 감동적인 무엇보다도 더 월등히 감동적일 것이다.
지난달, 김수환 추기경이 하늘나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그 마지막 모습을 보기위해 길고 긴 행렬을 만들어낸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래, 바로 저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 기나긴 줄에 합류하면서 추기경의 선종이 아닌 그분의 삶을 느끼고 볼 수 있었다.
울컥 눈물이 났다. 그 눈물을 멈출 수도, 닦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눈물 뒤에 맑게 웃을 수 있었다. 어떻게 눈물 뒤의 웃음이 그렇게 맑을 수 있을까. 참으로 오랜만에 내 안에서 맑고 그윽한 풍경소리가 일렁이고 있는 듯 했다. 그것은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과 만났을 때, 내가 감동하면서 들었던 그런 소리와 같았다.
우리는 종종 ‘마지막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말을 하곤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아름다운 마지막에 동참하고 싶은 소망 때문이다. 여기서 마지막이란 결과만을 뜻함이 아닌, 전 일생과 연결돼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름답지 않은 행동과 아름답지 않은 생각으로 인생의 순간을 얼룩지게 만든다. 그러한 인생의 마지막은 뻔하다. 우리는 그런 최후를 자주 보고 들어왔다.
김수환 추기경을 보내드리면서, 우리 모두는 엄청난 현실에 놀라워했다.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가 울먹거렸고 아쉬워했다. 그를 영원한 정신의 동반자로 새기겠다는 다짐을 했다. 우리는 그 동안 너무 배고팠다.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소박함과 평범함에, 헌신과 나눔에, 감사와 진정한 사랑에 굶주려 있었다.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잠자던 정신을 일깨워 준 소중한 기회가 됐다.
특히 우리가 크게 감동한 것은 그분이 평소에 보여주신 ‘말과 행동의 일치’였다. 이기심으로 가득한 우리들은 말은 번드레하게 참 잘한다. 그러나 그 가면 뒤에는 악마의 얼굴이 숨어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과 행동이 일치했던 그분의 그림자라도 멀리서 뵙고 싶었다. 그렇게 추위를 견디며 길거리에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느리고 더딘 걸음으로, 그러나 행복한 걸음을 천천히 걸을 수 있었다.
그 줄에서 만난 이들 중에는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내 손을 잡고 마치 과분한 자리에 초대받은 것 같은 행복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나 역시 ‘주님, 이들을 돌보소서’하는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몇 시간씩 추운 거리에 서 있는 자체가 우리 모두에게는 기쁨이었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당시, 온 국민이 만들어낸 한마음의 일치가 다시 펼쳐지는 듯 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만들어 주신 이 사랑의 축제는 앞으로도 영원한 우리 사회의 반석이 될 것이다. 모두들 마지막 순간까지 기억할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가 열리면 우리들은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외치며 손이 깨져라 손뼉을 쳐댔다. 바람이 불어도 비가와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우리 편 이기라며 목청이 터지도록 외치고 또 외쳤다. 내 편이 있다는 것은, 그렇게 손이 깨져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우리 편을 잃었다. 편들 곳이 없어진 것이다. 손뼉 칠 곳이 없어진 것이다. 우리들의 두 손은 외로웠고 추웠다. 우리들의 두 손은 방향을 잃고 방황했다. 결국 우리들의 두 손은 서서히 상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김수환 추기경을 보내드리며 우리는 드디어 우리 편을 찾았다. 그 어떤 보상 없이 손뼉을 치면서 가슴이 깨져도 좋을 만큼의 내 편을 찾은 것이다. 두 손은 따뜻해졌고, 방향을 찾았고,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그분이 남기고 간 ‘사랑’이 아닐까. 이제 모두 힘을 합쳐 그 사랑을 영원히 보존하자. 그것이야 말로 그분의 사랑에 보답하는 일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