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책상 위….
동양철학 서적 몇 권이 꽂혀 있다. 마음 허전할 때 심심풀이로 만들어온 건담 프라모델 5종이 있고, 그 한 켠에 성모상이 밀려 서있다. 책상 앞 쪽에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사진과 그가 만든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스틸 사진이 압정으로 고정돼 있다. 한때 활동했던 성당 축구단 단체 사진과 미술 및 예술 관련 자료들도 함께 그 옆에 있다. 서랍 속에는 최근 유행하는 뮤지컬 예매표 두 장이 들어있다.
10년 전 도올 김용옥의 동양철학 강의가 세간에 화제가 됐을 때부터 동양철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노자에서부터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주석서와 불교에 이르기까지 관련서적 20여권을 6개월여 만에 독파했다. 세상 사람들이 동양철학에 관심을 가지니까 나도 덩달아 뭔가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생각에서였다.
미술 관련 자료도 마찬가지다. 피카소, 렘브란트, 카라바조, 벨라스케스 등 유명 화가들의 그림에 많은 이들이 감동을 받는다는데 혼자서만 무식한 원시인 취급당하기 싫어 관심 가지기 시작한 것이 미술이다. 2002 한일 월드컵의 열기에 들떠 축구단에 가입했고, 너도나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영화에 몰려가니까 덩달아 스티븐 스필버그를 좋아했다. 건담 프라모델도 유행을 좇아 괜히 멋있어 보여 만들기 시작했다. 서랍 속 뮤지컬 표도 요즘 다들 뮤지컬 보러 간다니까 ‘나도 한번?’측면이 없지 않다.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남 따라하기’를 품고 살아가는 것인가. 조금이라도 유명세를 타는 영화는 꼭 봐야 하는 것이 요즘 젊은이들이다. 그림에 문외한인 부모가 너도나도 아이들 손을 잡고 피카소 그림을 보기 위해 몰려가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성들의 립스틱 색깔이 유명 드라마에 따라 천편일률적으로 변하는 것은 왜일까. 짝퉁 명품이라도 들고 다녀야 마음이 채워지는 것은 왜일까. 휴대폰이 필요 없는 사람들까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휴대폰을 사는 이유는 뭘까.
한국사회의 ‘남 따라하기’는 유별난 측면이 있다. 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돌리는 부모들의 심정도 ‘남이 하니까’다.
조선시대 후기 ‘얼개화꾼’이라는 말이 있었다. 당시 조선에는 개화의 바람이 불면서 많은 개화꾼들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신식 양복에 자전거를 타고, 혁신적 사상을 표방하는 ‘개화꾼’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덩달아 생겨난 것이 얼개화꾼들이다. 얼개화꾼은 개화꾼이 아니면서, 개화꾼인척 외모와 사상, 지식을 치장하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진짜 개화꾼은 조급하지 않다. 그저 자신이 걸어가는 길을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바쁘고 마음 혼란하고, 조급해 하는 것은 개화꾼 흉내 내기 바쁜 얼개화꾼들이다.
희망은 묵직함에서 나온다. 희망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 주실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끊임없는, 묵직한 신뢰다. 다른 사람들 눈치 보기 바쁜, 붕 떠 있는 마음에서는 희망이 뿌리내리지 못한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에는 이런 말이 있다. “다들 화롯가에 엿 놓고 왔능가. 이리 발바닥에 불나게 걷는다고 무신수가 생기는겨?”(1부 3권 11쪽)
지금까지 주위 사람들 어떻게 살아가는지 관심 기울이느라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이제 천천히 걷자. 십자가는 어차피 남이 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눈을 감고 나를 조용히 되돌아보자. 사순시기다.
책상 위를 정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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