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안 ‘쌍화점’이란 영화가 인기를 끌었었다. 이유인즉슨, 잘 생긴 미남 배우가 시원하게 훌렁 벗고 나와 여성들의 호기심을 자극시켰기 때문이란다. 미남 배우의 조각 같은 나체를 감상할 수 있다면, 나도 영화 값이 아깝지 않을 것 같다. 물론 그 젊은 남자의 몸이 나이든 여자의 가슴도 울렁거리게 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남자의 몸은 전혀 다른 의미로 내 마음 속에 각인돼 있다. 나도 한창 젊은 날에는 남자의 몸에 대해 짜릿한 감각과 관능적인 느낌을 어렴풋이 가진 적이 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세월이 지나면서는 ‘남자의 몸이 그게 다 그거겠지 뭐…’하는 그런 정도였다.
남자의 몸이 내게 다른 의미로 다가온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염을 할 때였다. 나는 당시 아버지의 완전히 벗은 몸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순간 비로소 아버지의 실존을 본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완전 육탈한 아버지의 모습은 당신의 비극적 인생을 대변하는 듯 했다. 그리고 앙상한 뼈밖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눈물 젖은 한마디가 떠올랐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코 15,34)
인간의 살이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살점 하나 없이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의 뼈에서 아름다움을 봤다. 모든 치욕과 상한 마음을 다 날려 보낸 맑고 눈부신 그것을 말이다.
부모에게 있어 자식의 배신보다 더 아픈 생채기가 있을까. 누구도 아버지를 집에 모실 수 없는 상황이었고, 우리는 싫다는 아버지를 기어이 병원으로 실어가고야 말았다. 그것은 뼈를 깎는 아픔이었다. 그때 아버지의 눈에서는 도살을 앞둔 눈물 젖은 소처럼 뻘건 불빛이 번쩍거렸다. 아마도 분노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병원에 계시는 일주일 동안 식사를 일체 거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노를 보았다. 절망을 보았다. 허공을 휘젓는 두 손을 보았다. 아버지는 그 순간 숨을 거두고픈 마지막 자기 보호를 표현하는 듯했다. 아버지는 그런 몰골로 생의 마지막을 보내게 된 것에 대해 통곡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시퍼런 분노, 그 분노까지도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아무리 이 세상에 선을 베풀었다 하더라도, 아버지를 버렸던 그 죄만큼은 절대 갚지 못할 것이라고….’
그렇다. 나는 아버지를 버렸던 것이다. 집에는 이미 두어 명의 환자가 있었고, 더는 환자를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였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를 낳아준 아버지에게 할 짓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병원에 누워 계셨던 일 년 남짓, 아마도 자식들의 배신을 곱씹으며 세상을 한탄하셨을 것이다. 그래도 그 모든 분노와 화를 삭이며 꼬박 일 년을 누워계셨다. 이 생각을 하면 지금도 나는 삼년 가뭄을 적실만큼의 눈물이 흐르곤 한다. 아, 나의 아버지!
그 시절 나는 새벽의 고속도로를 달려 병원에서 아버지를 잠시 뵙고, 다시 그 길을 돌아와 출근을 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오늘 아버지가 주님 곁으로 가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곤 했었다. 나는 참 여러 사람을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한 장본인이다. 남편과 시어머니도 모자라, 아버지까지…. 모시지도 못하면서 병원에 외롭게 누워 계시는 아버지를 본다는 것은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과도 같았다. 그래서 빨리 주님 곁으로 가시길 기도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 기도도 나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아버지는 팔순을 넘겨 스스로 성당을 찾아가신 분이다. ‘대하소설’처럼 길고 복잡했던 당신의 삶을 정리하는데 하느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율리오’라는 세례명을 받은 아버지는 하느님께 매달리며 마지막 병원생활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기도 했었다. 당시 아버지의 머리맡에 계시던 성모님을 지금 내가 모시고 있다. 그 성모님 앞에서 나는 아침마다 용서를 빈다. 내 아버지를 위로하시고, 내 아버지를 지키셨던 그 성모님은 이제 나와 함께 계신다.
내가 다니는 본당의 성전 정면에는 알몸의 예수님이 처연하게 걸려 계신다. 알몸으로 계신 예수님을 볼 때면 마음이 아프게 저려온다. 그 모습 앞에서 우리는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를 드린다. 그러나 성당 문을 나서서는 그 영성의 실체를 몇 번이나 떠올리며 사는 것일까. 그분은 벗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루 온종일 그분의 손길과 옷자락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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