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 동안 한국에서는 민족주의 문제가 거론되면서 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민족주의는 영어 내셔널리즘(nationalism)을 번역한 것이지만, 이 어휘는 국민주의, 국가주의 등으로도 번역되므로 어떤 의미로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민족주의란 인간 의지의 통일성과 정당성에 관한 생각 및 정주공동체(定住共同體)의 자연적 통일성과 가치, 그리고 과제에 관한 관념이라는 두 가지 가정을 토대로 삼은 정치사상과 정치적 결단의 체계이다. 민족주의는 역사적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동경이나 고무(鼓舞)의 감정, 혹은 증오 내지 혐오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동일한 개념 밑에서 자유와 독립, 혹은 억압과 침략을 뜻하기도 한다. 실제로 우리는 근대에 정치적 단위를 이룬 민족 국가의 다양한 역사적 발자취에서 그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암울했던 시기 한국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 역시 민족주의였다. 한국의 민족주의 사상은 구한말에 반봉건과 반침략운동을 통해 형성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국권회복운동과 근대국가건설을 위한 평등 이념의 내면화, 해방 직후에는 자주독립 건설과 좌우 이념의 조화와 협력, 민족통일운동을 이룬 핵심 사상이었다. 특히 유신 군부 정권 하에서는 인권·민주화 운동과 민중운동?통일운동을 표출시키는 근본적 에너지로서 작용하기도 했다.
최근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삼국 사이에 민족주의적인 공방이 뜨겁다. 중국의 고구려사 자국 역사 편입,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와 독도 영유권 망언 등, ‘동북아 국가주의’가 급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가 동아시아 구성원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한편 민족주의와 대립되는 경향은 전 세계적으로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세계화’의 물결이다. 궁극적으로 국민국가의 역할을 약화시키거나 변형시켜 결국은 국민국가를 해체시킬 것으로 예측되는 세계화의 초국가적 성격은 이미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의 출범, 세계무역기구(WTO),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등으로 가시화되고 있다. 이러한 초국가기구의 연이은 출범과 경제 분야에 있어서 탈규제의 바람은 민족국가, 국민국가의 틀을 거세게 흔들고 있다.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비교적 굳건한 민족주의를 견지해 왔던 국가들은 발전양상에 있어서는 각기 다른 모습을 보였지만 세계화와 세계 시민주의라는 거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각국의 근대화를 지탱했던 민족주의의 담론은 세계화시대에도 과연 유효한가? 동아시아 지역의 민족주의적 경향과 발전 양상을 되짚어 보면서, 세계화 시대에 맞추어 나아가야 할 길을 조망하는 작업은 언제나 긴요하다.
역사소설 「로마인 이야기」를 집필한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는 다른 민족보다 늦게 형성된 로마인들이 세계제국을 이룩한 주요 원인을 피정복 민족까지 포용할 수 있는 관용성과 개방성에서 찾고 있다. 각각의 사례와 인물들을 통해 일관되게 나타나는 로마인의 힘은 개방성과 관용성이었다. 그는 고대 로마인이 후세에 남긴 진정한 유산은 광대한 제국도, 2천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위용을 자랑하는 유적도 아니며, 민족, 종교, 인종, 피부색이 다른 상대를 포용하여 자신에게 동화시킨 로마인들의 개방성의 힘이었다고 지적한다.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동아시아가 나아갈 길은 열린 민족주의이다. 타문화를 이해하고 존경하며, 서로 다른 문화끼리 갈등하기보다는 공존하고 다양성을 인정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정신을 가져야 하겠다.
시오노 나나미의 문제의식에 따르자면, 우리는 타민족, 타인종, 타문화를 포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아량이 있을까? 외국인 노동자, 중국동포, 탈북자 등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을 포용하지 못해 이들에게 좌절과 울분을 일으키는 우리 민족은 세계의 민족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상충하는 ‘동아시아 민족주의’의 갈등을 극복하고 평화와 공존의 동아시아, 인권과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동아시아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형태의 협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동아시아 공동의 역사인식이다. 동아시아 각국이 모두 자국의 역사교과서에 들어있는 왜곡된 역사인식을 비판하고 바로잡기 위한 공동의 노력이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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