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1916~1978) 선생님은 2월이면 베갯잇에서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시인의 예민한 감각에 누구보다 먼저 봄이 오는 소리를 들었던 것은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2월이면 얼마나 추운가. 겨울의 중심 아니었던가. 겨울의 한 복판에 서서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 사람, 어쩌면 그 사람이 진정한 시인인지도 모른다.
3월인데도 아직 춥다. 그래서 더욱 봄이 기다려지고, 마음의 추위를 찬란한 봄의 기운으로 풀고 싶다. 봄이 오는 것을 우리는 ‘풀린다’고 말한다. ‘풀린다’는 말은 황홀할 정도로 마음에 와 닿는 표현이다. 근심이 풀리고, 절망이 풀리고, 직장이 풀리고, 건강이 풀리고, 가정의 화목도 풀리고…. ‘풀리는 날’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리는 봄이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봄이 그야말로 모든 것이 풀리는 봄날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얼음이 스르르 풀리는 계절. 그래서 우리는 봄을 기다려왔다. 오해가 풀리고, 관계가 풀리고, 사람들 사이의 모든 얼었던 냉기가 풀리고…. 그래서 봄 같은 화사한 향기로 너울거리는 봄이 우리에게 온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리는 봄의 정령이리라.
지난 겨울은 유난히 따뜻했다. 더러 추위가 찾아오긴 했지만, 지구 온난화의 심각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 이제야말로 온난화에 관심을 가져 인류의 불행을 막아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걱정스럽다. 나는 사계절이 분명한 나라에서 산다는 것도 행운으로 여겼었다. 특히 겨울의 추위야말로 인간에게 일상적 도(道)를 경험케 하는 정신치유법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시인들이 겨울을 노래하는 것은 겨울이 주는 이미지 때문이다. 겨울은 냉혹한 자기절제와 자기의 힘을 뛰어넘는 극복의 정신을 일깨운다. 시인들은 이러한 겨울의 모습을 자신의 시에 녹이고 싶었던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겨울은 역설적으로 가장 따뜻한 계절이라고. 그만큼 겨울은 우리들에게 극복하기 위한 어려운 고비였으며, 그 겨울로 인해 사랑과 희생을 배우기도 했다. 그래서 겨울이 오기 전에 ‘겨울준비’를 가져야 했고, 겨울이 끝나면 ‘겨울을 살아냈다’고 표현하곤 했다.
그랬다. 옛날의 추위에 비하면 지난 겨울은 겨울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보낸 60년대에는 미니스커트가 유행했었다. 푸르게 젊어 펄펄 끓는 열정으로 어찌 그 유행을 건너 뛸 수 있겠는가. 누구나 미니스커트를 입고 강추위 속으로 등교를 했다. 그 시절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았던 우리들은 주로 거리를 휩쓸고 다녔다.
난방도 잘 되지 않는 여건에서도 그 멋쟁이 유행병은 고쳐지지 않았다. 종일 맨 종아리로 높은 하이힐을 신고 쏘다니다가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 두 다리는 거의 마비된 것 같이 얼어 동상에 걸려있었다. 그래도 그 다음날 또 미니스커트를 입고 하이힐을 신었다.
방도 추웠고 자취로 해 먹는 밥도 시원찮았다. 그것이 젊음이었을까. 두 다리가 얼어도 아프지 않았다. 우리가 진정 슬펐던 것은 대책 없는 외로움이었고, 아득하기만 했던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머리맡에 둔 물그릇이 꽝꽝 얼어있는 것을 아침에 발견하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그것이 겨울이었고 그것이 우리들의 삶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겨울에는 눈이 허리까지 쌓이는 일도 없으며, 교통편도 발달했고 실내도 따뜻해 미니스커트를 입어도 동상에 걸리는 젊은이들은 없다. 그러나 겨울은 여전히 겨울이다. 우리들의 어깨를 움츠리게 한다.
요즘 아이들은 겨울을 통해 극복의 정신을 배우는 데 난항을 겪는다. 한 정거장도 자동차로 태워주고, 바로 앞 학교도 자동차로 등교시키는 부모들의 지극한 사랑 탓이다. 겨울은 단지 춥다는 의미를 넘어서, 정신의 대결구도를 건강하게 만들고 절망의 순간에서도 우뚝 일어서게 하는 뚝심정신을 배우게 하는데….
겨울이 따뜻해진다는 걱정, 이로 인해 지구 온난화를 겪고, 곧 인류의 멸망이 다가올 것이란 우려들. 그러나 진짜 걱정해야 할 우려는 살아남은 인류가 정신적으로 허약해진다는 것이다. 육체가 아니라 정신, 그리고 그 정신을 이끄는 영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왜 봄은 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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