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태어나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가장 가깝게는 가족을 만나 친척이나 이웃을 알게 되고, 학교와 직장이란 사회를 거쳐, 가족과 가족의 만남인 결혼까지 수없이 많은 이들을 만나고 헤어지기도 한다.
사실 그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모두 감동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잠시 스쳐가는 인연이든, 오랫동안 이어가는 만남이든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세상에 태어나 어떤 이유에서건 누군가를 만나고 서로 알고 지내는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이고, 또 축복받을 일이다.
물론 보기 싫은 사람,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인연도 있다. 그러나 한 생애를 살면서 맺는 사람과의 인연은 소중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우리가 쓰는 말 중에 ‘동행’이란 단어가 있다. 진정 따뜻한 말이다. 사랑이나 평화, 애인, 어머니 같은 말도 단어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고 아름답다. 하지만 여기에 ‘함께’라는 의미가 더해지지 않는다면 감동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동행’은 ‘가족’이라는 말과 감정을 통한다. 꼭 혈육만이 가족은 아니다. 함께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 두고도 우리는 가족이라고 말한다. ‘가족’이란 말은 응집력을 갖고 있어, 무슨 일을 함께 하거나 같은 생각을 갖고, 혹은 같은 행동을 하거나 뜻을 같이 하는 관계도 우리는 가족이라고 부른다. 흔히 ‘같은 배를 탔다’고 비유하는 그것 말이다. 동시대에 사는 모든 인류를 통틀어 ‘지구촌 가족’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러고 보면 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도 대단한 인연이다.
‘가족’이란 표현 앞에선 서로의 거리도 가까워지고, 감정의 소통도 빨라지며, 상대를 이해하려는 배려심도 생긴다. 직장 안에서 서로를 가족이라 여기면 공동체 일치감의 열도가 높아진다. ‘가족’이란 말에는 훈기가 가득해 난로처럼 따뜻하고, 찬 손을 데울 수도 있을 것 같다.
‘동행’이란 말은 그래서 우리에게 힘을 가져다준다. 혼자가 아니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고, 누구와 함께 간다는 위로를 준다. 길에서 부딪히는 장애물들을 두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동행’은 하나의 의미를 갖는다. 이 경우에 하나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색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색을 더 돋보이게 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 협조와 이해, 단결 등의 힘이 하나를 이루면서 보다 큰 덩치를 만드는 것이다. 혼자 해결할 수 없었던 난항을 무난히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조각보’라는 것이 있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천을 사용하고 남는 조각들을 반짇고리에 잘 보관했다가, 보잘것없고 사용 불가했던 작은 것들을 서로 잇고 손잡게 해 주었다. 그것은 세계적인 화가들도 그리지 못했던 어떤 초월적 색의 조화를 이루게 한 완전한 예술품으로 탈바꿈했다. 버리는 조각들로 만들어낸 예기치 않던 빛과 색과 모양들의 기묘한 접합은 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예술이었다.
서로 다른 보잘것없는 존재들을 모아 하나의 큰 세계로 만들어 놓는 것은 하느님의 창작품이다. 놀라운 일만은 아니다. 부족한 것을 가지고 정신적이고 예술적인 경지로 이끌어 준 정신의 모태는 홀로의 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집단과 응집의 힘이자, 화합의 열정을 보여준 극점이다. 그것을 우리는 말씀에서 배운다.
참으로 거친 세상이다. 나 아닌 다른 존재는 경계의 대상이요, 다치기 쉬운 무기로만 생각한다. 사람 사이의 신뢰가 흔들리고 의심이 가득하다. 그래도 우리 사는 세상에는 서로가 다른 것을 존중하며 나란히 걸어갈 수 있는 동행의 길이 아직도 있다.
우리 모두는 그런 동행을 그리워했다. 때로는 어떤 아름다운 동행이 내 인생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하기도 했다.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우리’보다 ‘나’라는 의식에 길들여져 왔다. 하나의 힘으로 뭉치기는 어려웠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멀기만 했다. 어쩌면 ‘우리’라는 말은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 그 어떤 덕목보다도 더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족’보다도 ‘개인’이 앞서는 현상은 우리 모두가 앓아온 현대적 병폐 아니었던가.
예수님도 하나가 아니라 더불어 가는 길을 가르쳐 주셨다. 제자들이 늘 그분의 그림자 가까이에 머물렀던 것도 ‘함께’라는 축복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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