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초순,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CNN방송을 통하여 미국의 심장부라고 하는 뉴욕의 세계 무역 센터와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이 테러 당하는 것을 생중계로 지켜보았다. 나도 하루 일과를 마치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그 광경을 지켜보며 거의 밤을 새웠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계 유일한 최대 강국이라고 일컬어지는 미국에서 일어난 초유의 테러 사건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면서 미국 당국은 테러범의 두목으로 지목한 빈 라덴과 그들을 비호하는 것으로 알려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세력을 응징하기 위해서 선전포고를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수천 명의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테러범들에 대해서 강력한 응징을 해야 한다는데 대체로 동의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같은 응징이 자칫 잘못하여 테러범이나 테러 집단이 아니라 무고한 시민들의 끝없는 희생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번의 폭탄 테러 사건 때에 CNN에서는 미국인들과의 생생한 인터뷰도 자주 전해 주었다. 한 중년남자는 인터뷰를 통해서 『우리는 미쳤다(We were crazy)』고 대답하였다. 그가 말한 「우리」라는 단어 안에는 단순히 테러범이나 그 집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인과 우리를 포함하여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우리들에게 『전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문명화된 세계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 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나는 그의 인터뷰를 보면서 갑자기 20세기 최고의 종교화가로 불리는 프랑스의 조르즈 루오(Georges Rouault, 1871~1958)를 생각하였다.
그는 세계 제 1차 대전 때 인간의 참상을 직접 보고 구원을 갈망하며 판화 연작 「미세레레」 (Mserere, 1917~27)를 제작하였다. 총 58점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들은 흑백 판화로 제작되어 주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느님 자비가 크오시니 나를 애련히 여기소서」로 시작되는 이 판화 연작은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로 끝난다. 연작의 여러 군데에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희생된 사람들과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 등이 담겨져 있다. 루오는 미세레레에서 고통받는 인간은 2000년 전에 죄없이 십자가에서 희생된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루오의 판화 연작 가운데는 「우리는 미쳤다」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에는 두명의 신사가 등장하고 있다. 그들은 커다란 눈을 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외적인 모습은 사람이지만 표정에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갖고 있어야 할 신앙이나 윤리, 양심이나 도덕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들은 지극히 현세적이고 이기적인 인간, 전쟁과 같은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또한 판화 연작 가운데는 「어머니들이 미워하는 전쟁」이 있다. 한 어머니가 앉아서 무릎 위에 어린 아들을 올려놓고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작품이다.
루오는 이 판화의 제목으로 어머니들보다는 전쟁을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전쟁터에서 아군이든 적군이든 간에 그들은 모두 한 어머니의 사랑스러운 아들딸로서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루오는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모든 전쟁이란 모든 어머니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루오의 판화에는 이처럼 인간사회의 부정적인 면모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미쳐서 전쟁을 일삼고 있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는 희망적인 요소가 많다는 것을 「사랑하면 그렇게도 포근할 텐데」라는 작품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루오의 판화 연작 제목이 「미세레레」 즉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인 것은 참담하고 암울한 세상 속에서도 하느님께 유일한 희망을 두고 있는 가난하지만 신뢰 가득한 기도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미워하는 전쟁이 머지않아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밀려오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다시 판화집 「미세레레」를 꺼내 들고 있다. 지금 나는 그의 뛰어난 작품들 가운데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사랑 안에서 내일에 대해 희망을 그리고 있는 작품들을 더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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