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소위 일류대학에 대한 통열한 진단을 해야
「무식한 동경대생」이니 「일본 젊은이의 지적 추락」이니 하는 제목의 기사들이 한국신문에 일제히 일본특파원발로 실렸다.
도쿄대생의 무식을 질타하는 내용인데, 431km나 되는 도쿄에서 일본 북단 삿뽀로까지의 거리를 30km라고 하는 도쿄대학생이 있다는 것이 단적인 예이다. 강남에서 김포공항이 30km가 넘는다는 걸 생각하면 좀 심하기는 심하다.
도쿄대 자연계열 학생이 고교과정에 대한 보충수업을 하지 않으면 강의를 소화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벌써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일본대학입시제도가 만들어낸 기현상의 하나다.
그러나 퀴즈에나 나올 듯싶은 문제, 4만km인 지구의 둘레를 이과(理科) 학생이 4천km이하라고 대답한다는 데는 어이가 없기는 하다.
일본 언론인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가 쓴 책의 내용을 전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여러 매체에 그는 도쿄대학생의 학력에 대한 의문과 우려의 글을 써왔던 언론인이었다.
1974년에 쓴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연구」로 수상의 금맥(金脈)을 비롯한 범죄를 추적, 사회적 충격과 반향을 일으킨 이래 그가 쓰는 글이나 저서는 언제나 일본사회에 화제를 불러일으켜 왔다.
우주를 비행하고 돌아온 전세계 우주비행사의 「그후」를 추적한 「우주로부터의 귀환(歸還)」, 말 그대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죽음의 체험을 엮은 '뇌사체험(腦死體驗)'을 비롯해서, 뇌물수수로 기소당한 다나카의 록히드 재판 전과정을 추적한 「거악(巨惡) vs 언론」은 명저에 속한다.
일본 명문대생의 학력저하에 대한 소리를 접하며 그렇다면 우리의 대학생은 어떤가, 눈을 돌리게 된다.
우리 고등학생들의 성적이 하향 평준화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는 금년도 수능고사 발표와 함께 터져나왔었다. 고교생들 가운데 2분의 1 더하기 3분의 1을 5분의 2라고 태연하게 대답하는 학생이 태반이라고 하니, 더 말하면 무엇하랴.
교육이란 결국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앎」과 「됨」이 그것이다.
지식이니 정보니 하는 것들을 얼마나 많이 기억하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을 앎이라고 작게 규정한다면, 됨은 그것을 어떻게 삶의 거름으로 삼아 스스로를 어떻게 지혜롭게 일구어 가느냐를 의미한다.
그런 뜻에서 나는 지금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앎의 깊이나 넓이보다는 됨의 지혜로움에 있지 않나 생각해 왔다.
단적인 예로 인터넷을 비롯한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 요즈음에 있어, 단순한 앎이란 그 의미가 많이 희석되어 버렸다. 대학에서 그것을 통감한다.
무엇을 알지 못해서 열악한 과제물을 내는 학생은 없다. 학생들은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마우스로 자료를 긁어서' 과제물을 작성한다. 쉽게 얼마든지 정보 지식을 얻어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지 「얼마나」알고 있느냐가 아니라는 것이다.
학벌위주의 사회적 틀이 견고한데다 대학을 서열화하여 무슨무슨 대학의 학생이면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일괄해서 통용되는 것이 우리 사회다.
그런 의미에서 다치바나 다카시의 도쿄대 질타를 '강건너 불'로 바라볼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소위 일류대학에 대한 통열한 진단과 비판이 있어야 한다.
교육평가 전국 몇 위니 하는 플래카드가 나붙는 대학정문 저 안에서, 대학의 부실이 언제까지 묵인되어야 하는 지, 대학 안팎에서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대학의 현실을 두고 심지어, 50년대 대학 강의실에서 70년대 강의노트로 90년대 학생을 가르친다는 자조 어린 탄식이 있어온 게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시설, 재원 모두가 열악하기만 하니 자신이 대학생 시절에 배웠던 강의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교탁과 책상이 있는 교실에서 요즘도 백묵가루를 날리며 판서를 하는 교수도 적지 않다. 최소한 그 시설에 있어 고등학교만도 못한 대학이 또 얼마나인지, 아는 사람은 안다. 서글프게도.
언제나 우리의 교육은 말 그대로 「100년대계」는 못 되더라도 「10년대계」라도 이룰 날이 올 것인지, 생각하면 가슴이 무겁기만 하다. 그 가슴을 안고, 어제도 나는 대학강의실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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