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1일 아랍 테러리스트들이 저지른 뉴욕 세계무역센터 폭파 테러와 뒤이은 아프간 전쟁은 전세계 식자들 사이에 뜨거운 '문명충돌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헌팅턴 교수의 저서 '문명의 충돌'의 주 논지는 세계사가 이제 국가간의 대립과 이데올로기 대립을 마치고 문명간의 충돌, 대립 단계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의 문명을 종교를 구심점으로 해서 나눈다. 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문명, 중부 아프리카와 중동 아시아에 집중 분포된 이슬람, 슬라브와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동방정교, 인도의 힌두문명 하는 식이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함께 유교문명으로 분류됐다.
헌팅턴식 문명갈등에서 충돌의 두 주역은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다. 여기에는 기독교 문명이 평화를 사랑하고 이성적인 반면 이슬람은 폭력적이고 비이성적이라는 전제를 바탕에 깔고 있다. 지금 전쟁을 서로 벌이고 있는 두 주체는 미국, 영국 등 기독교국가들과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이슬람국이다.
테러사건이 일어난 뒤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자 헌팅턴 교수는 "이번 사건은 문명간 충돌이 아니라 문명과 야만의 충돌"이라는 말을 했다. 무고한 민간인을 대량살상한 테러리스트들은 이슬람 문명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명충돌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식자들 사이에 이번 사태를 문명충돌로 보는 견해는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문명충돌론을 비판하는 학자들은 이 이론이 각 문명의 특징을 너무 이분법적으로 단순 도식화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 이면에 비서구 사회에 대한 서구 기독교사회의 우월성이 교묘히 감춰져 있다고 반박한다. 이러한 편협한 이분법으로는 문명간의 진정한 화해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논리다.
일견 쌍방이 다 일리 있는 주장일 수 있다. 하지만 테러와 폭력은 나쁘고 인명은 중시돼야 한다는 인류 공통의 가치관을 판단의 준거로 삼을 수는 있다고 본다. 사무실에 출근해 아침 커피를 마시고 있던 죄없는 민간인 수천명을 한꺼번에 죽인 행위가 과연 어떤 주의, 주장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유엔은 이 테러행위를 휴머니티(인륜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규정지었다. 누가 뭐래도 테러행위는 응징돼야 한다.
그러나 한편에선 이런 테러를 낳은 원인이 아랍세계를 고립시키고, 그곳 국민들의 빈곤을 조장한 미국과 서방의 차별정책에 있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물론 일리 있는 주장이다. 그러면 미국이 테러범들을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켜 그곳에서 또 죄없는 민간인들을 수없이 죽게 만드는 것은 또 어떻게 보아야하는가. 이것도 또다른 형태의 테러행위가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전쟁에서는 죄없는 사람이 다치게 돼있다. 아무리 무기체계가 현대화됐다고는 하나 꼭 군사목표물만 파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폭도 생기고 군사목표물을 공격하다 보면 주위에 있던 병원, 민간시설, 민간인이 다치게 돼 있다. 따라서 전쟁이 장기화되고 그 규모가 확대되면 이에 대한 비판 여론도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미국도 전쟁의 규모와 작전기간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주문이 힘을 얻고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테러에 대한 근원적인 치료법 즉 테러가 발생할 토양을 치료하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다른 문명에 대한 이해심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테러사건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이슬람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방송에 이슬람 전문가들이 수시로 출연하고 이슬람에 관한 서적 판매량이 급증하는 등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이슬람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는 추세다.
이슬람권은 몇몇 석유부국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가난한 나라들이다. 이들에 대한 경제지원 등을 통해 문명권간 빈부격차를 줄이는 국제적인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그래서 그곳의 위정자와 국민들이 서방에 대해 소외감을 덜 느끼도록 도와야한다. 100억 달러가 넘을 것으로 보이는 아프가니스탄 복구작업 지원에 유엔과 유럽연합 등 국제사회가 적극 나서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또하나 중요한 것은 아랍세계의 정치적 민주화와 교육이다. 이슬람권 대부분의 나라가 지금도 왕정을 유지하고 있다. 이번에 무너진 탈레반 정권도 이슬람 원리주의를 주창하며 도를 넘는 압제정치를 해왔다. 압제 아래서 일반국민들이 겪는 불만은 폭력적인 형태로 발산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울러 이곳 국민들로 하여금 민주적인 가치관에 대한 교육의 기회가 더 많아지도록 국제적인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 지금은 지구촌 시대다. 지구 반대쪽에서 일어나는 테러와 전쟁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테러를 근절시킬 토양을 만드는 데 지구촌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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