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다가온다. 지나온 삶의 자취를 돌아보며 무엇을 뿌려왔고 어떤 결실을 맺었는지를 헤아려보는 때이다.
인간과 사회가 올바른 발전과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 역사를 되돌아보고 기억하는 성찰이 있는 곳에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정의를 꽃피울 수 있다.
최근에 몇 가지 사건들이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1973년 서울대 교수였던 최종길씨와 1975년 재야 운동가였던 장준하씨의 의문사, 1987년 수지 김 피살 사건, 작년에 수사가 마무리되었다가 다시 재수사에 돌입한 진승현 게이트 등 일련의 사건들에 공통된 점은 과거에 무언가 잘못된 점들이 속속들이 그 실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감추인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마태 10, 26)이라는 말씀이 새삼 실감난다.
국가기관에 의한 고문치사, 살인은폐, 간첩조작 등의 혐의가 있던 사건들을 대통령 소속 의문사규정위원회는 과거를 기억해내고 역사를 바로 잡으려 하고 있다.
또한 일년 전에 덮어두었던 진승현 게이트 역시 부패된 비리의 먹이사슬을 폭로하면서 소위 잘 나가던 사람들이 추풍낙엽으로 떨어져나가고 있다.
정의로운 인간과 사회가 되기 위한 조건은 망각되거나 기피되어왔던,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려 참된 진실을 알리는 것이다. 물론 과거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자는 것이 아니다. 은폐되고 조작된 과거의 기억을 제자리에 놓아 오늘도 내일도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매듭을 정확히 짓는데 있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는 성찰의 시간을 가지지 못해왔기 때문에 오늘도 연일 터져 나오는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로 이 나라는 좥총체적 부패공화국좦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살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압축적 근대화로 경제성장을 이룬 이 사회는 앞만 보고 『빨리빨리』 전진했을 뿐 잠시 멈추고 뒤돌아볼 여지를 두지 않아 왔다.
속도의 신화에 매몰된 이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남보다 빨리 돈과 권력을 획득하여 출세하고자 무한경쟁을 하고 있다. 남을 짓밟고 일어서야 내가 승리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인물을 두 가지로 죽인다고 한다.
『약하게 보일 때는 눌러 죽이고, 세게 보일 때는 띄워 죽인다. 그러니 처신에 조심해라』
자기보다 앞서 잘 나가는 사람이 있을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딴지를 거는 몰인정하고 비정한 경쟁의 사회에서 한탕주의, 업적주의, 성공주의 등이 성행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회에서 성찰과 반성은 하나의 걸림돌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집단적 치매증에 걸려 가까운 과거의 잘못마저 쉽게 잊어버림으로 해서 또 다른 불의의 시작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있지는 않은지 자못 염려스럽다.
치매증이 무서운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내고 유지해 주는 과거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치매증이 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 집단화될 때 그 사회는 아노미(anomie) 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신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사를 볼 때 주변의 강대국 사이에 끼어 이방신들에 대한 우상숭배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야훼 유일신앙을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은 매년 파스카 예절을 통해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에집트에서 탈출시켜 주셨음을 기억해왔기 때문이다. 고난을 당할 때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출애굽이라는 '원초적 체험'을 기억하는 가운데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성찰은 인간의 삶과 사회가 올바른 가치관과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새로운 활력소를 제공한다.
더 나아가 성찰은 참회와 회개의 길을 열어준다. 작년에 한국 천주교회는 좥쇄신과 화해'라는 문헌을 발표하여 과거 역사적으로 저지른 과오들에 대해 반성하고 새롭게 거듭 태어날 것을 다짐한 바 있음을 기억하자.
성탄과 연말을 맞아 망년회로 모든 것을 단순히 잊어버리는 때로 보내기보다는 반성적 성찰을 통해 참회하고 그 회개의 결실이 정의의 실천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가톨릭대학교 졸업 후 미국 북텍사스대와 펜실바니아 주립대에서 신문방송학 석사·박사 학위를 각각 받은 김민수 신부님은 서울 불광동본당 보좌를 시작으로 일산본당 주임, 평화방송 TV주간 등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현재 서울 신수동본당 주임과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총무를 맡고 있으며 서강대,가톨릭대에 출강 중이십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