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날 첫 아침이 열렸다. 밤사이 소리없이 내린 눈이 온 세상을 덮어 고요한 밝음이 차오르는 이 시간, 나의 기도는 한편의 시(詩)로 시작된다.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눈길/ 사랑/ 솜사탕 같은/ 새하얀 눈밭
하느님 고맙습니다/ 이렇게 고운 선물
올해는 환한 가슴으로/ 이쁜 발자국 찍으며/ 소박하게/ 열심히 /걸어가렵니다"
이 시를 쓸 때의 나의 심정은 해마다 새해를 맞을 때의 솔직한 생각이요 다짐이었다.
올해는 무엇 무엇을 꼭 실천해야지 하고 이것저것 새 공책 첫장에 적어넣은 일기장이지만 세모(歲暮)무렵에는 슬그머니 부끄러워지곤 하였다. 그렇게 놓친게 많은 채 해가 거듭되고 세월은 간다. 올해는 그러나 개인적인 소망은 속으로 가만히 읊조리고 좀더 차원높은 큰 소망을 가져보려 한다.
크게는 세계평화와 우리 사회의 안정적 발전이요, 실업자와 노숙자가 없는 경제부흥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이 길이 남북한 평화통일로 이어지는 길이 되어질 것이다.
또 한해를 보내고 맞이하면서 우리는 크고 작은 모임에서 축배를 들면서 '건배' 또는 '위하여' 대신에 '나가자!' 라고 하였다. '나라와 가정과 자신을 위하여!'라는 뜻이다. 새겨볼수록 좋은 말이다. 우리나라가 당면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올해 열리는 월드컵 국제행사도 잘 치뤄내야한다. 지난해의 끔찍했던 미국의 수난(受難) 테러사건 같은 일이 다시는 없어야하겠고 이 지구상에 아프간사태 같은 불행한 일이 더는 없어야한다. 세계평화는 곧 우리의 평화인 것이다.
가정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할 때 세속이 주지 못하는 평화를 평화의 모후께 빌고 싶다. 근래 각 가정의 위상이 많이 흔들리고 있다. 통계수치는 한해 결혼 1400쌍 가까이가 이혼한다는 놀라운 비율도 보이고 있다. 그런 문제와 함께 더 심각한 건 가족간의 사랑과 존중심리가 희석되어 거룩한 원의와 바른 생각과 옳은 행위를 잊고 결혼의 신성함이 손상될까 두렵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과도기 현상인지 모른다. 유행은 흘러가면 스러져버린다는 점에서 언젠가는 바로 잡힐 것으로 기대를 해본다. 마치 까만 머리를 노랗게 빨갛게 파랗게 물들인 청소년들이 거리를 쏘다니는 것처럼 가정위상의 흔들림도 외로움을 알게되면 따뜻한 인간관계가 회복되고, 나와 남과의 관계도 다시 깨우쳐 새롭게 손잡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좀더 심각하게 시기를 놓치지 않고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가 있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려가야 한다는 자각된 노력이 가정과 학교와 사회에서 함께 펼쳐지고 진행되고 성취되어야 하는 과제이다. 특히 청소년층의 언어파괴현상이 이대로 방치된다면 우리나라의 문화발전에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될 것이다.
컴퓨터 앞에서 이메일로 주고받는 글은 대개가 철자법 무시를 비롯해서 엉터리로 일그러지고 요약된 단어와 문장으로 정상적인 표현이 거의 없으며 청소년들이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의 문자교신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세련된 N세대의 특권처럼 여기는 듯 하다. 이렇게 흘러가다 보면 오늘의 청소년들이 성인이 되고 사회의 주역으로 역사를 세워나갈 때 문화의 정체성이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바라건대 우리말과 글을 사랑하고 아껴 가꾸는 풍토가 되도록 우리 모두 힘써가야겠다. 말은 사상(思想)의 옷이요 영혼을 이끄는 불가사의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선현들은 지적하고 있다. 메마른 언어는 뜻을 낳지못하며 우리 입에 노래를 주지 않는다고도 말했다. 1979년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리스 시인 오디세우스 엘리티스가 한국인 특파원에게 한 말을 잊을 수 없다.
"나는 오래전부터 한국을 알고 있었다. 깊은 전통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나라에게 수난을 많이 받은 어둠이 우리 처지와 비숫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난은 창조의 원천이다. 역경을 이겨내고 독립하여 근면하고 강한 민족으로서 본래 가진 정신적 자산 위에 경제적 힘을 가진 나라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인상 깊은 메시지를 전했다. "현대 희랍어는 그리스민족에겐 너무나 깊게 넓게 영혼을 감싸안아준다. 한국말과 한국 문학도 반드시 세계인들 사이에서 외롭지 않은 영혼의 언어로 전승될 것을 믿는다"
한 시인의 이 긍지, 이 신념에 찬 축복의 말을 새삼 곱씹어보면서 우리 지성인, 종교인, 교사, 부모 모두 올해부터 솔선하여 우리말과 우리글을 아끼고 가꿔가면서 젊은 영혼들을 따뜻이 손잡아주자고 말하고 싶다. 저 깨끗한 눈밭에 예쁜 발자국을 찍으며 그렇게 살았으면 한다.
김후란님은 한국일보, 경향신문 등의 기자직을 거쳐 한국 문인협회 이사, 16대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현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회장,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 등을 맡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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