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전에 작고한 김남주 시인이 남긴 시 가운데 이런 게 눈에 삼삼하게 들어온다. "감방/ 문턱 위에/ 걸쳐 있는/ 다람쥐 꼬리만큼한 햇살/ 삭둑삭둑 가위질하여/ 꼴깍꼴깍 삼키고 싶다/ 언 몸 봄눈 녹듯 녹을 성싶다"
춥고 배고픈 감옥살이, 어서 봄이라도 찾아오면 몸이 녹듯 얼어붙은 마음도 따듯해지리라 염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손에 잡힐 듯 읽혀진다.
십년만에 얻은 아기를 보면서, 언제 이 아기가 지상의 흙을 밟으며 걷고 뛰고 좬아빠, 이리 와 봐좭하고 발음할 수 있을지, 그래서 내 마음이 대낮같이 환히 열릴 날이 올지 기다리면서 첫 돌이 지났다. 시인의 마음이 햇살을 가위질해서라도 꼴깍 목에 넘기고 싶어하는 만큼, 나는 아이의 미래를 미리 예감하고 미리 맛보고 있다.
누워있던 아기는 부지런히 뒤집기를 시도하다가 결국 뒤집고, 배밀이로 기어다니다가 결국 무릎으로 기는 법을 터득하고, 무릎을 세우고 일어섰다 넘어지고 또 일어선다.
아기는 그 시기에 적절한 사명을 다하려고 에너지를 집중하고, 젖먹는 힘으로 안간힘을 다한다. 떠듬떠듬 옹알이를 옮기며 언어를 준비하는 아기는 스스로 한 인간으로 진화하기 위해 어쩜 우주의 공력을 한껏 모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사는 다 때가 있다던가. 그러나 미래는 준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란 생각이 든다. 하루의 몫을 충분히 충만하게 살아야 때가 찾아 왔을 때, '온전하게' 걷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나흘 한겨울에 난데없이 비가 내렸다. 마을사람들은 '겨울 장마'라고 불렀다.
햇살이 다시 비추었을 때, 포근한 날씨는 어설픈 농부에게도 봄을 미리 준비하라는 예고처럼 느껴졌다.
나무들은 한번 다 살고 잎사귀를 기꺼이 지상에 내려놓았지만, 새 봄에는 새로운 싹을 창조할 것이다.
그들은 겨우내 수행(修行)한 뿌리의 힘으로 매년 세상을 다시 창조한다. 나는 지금 그네들에게 눈빛을 맞추고 있다. 나무들과 더불어 아기와 더불어 성장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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