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 미국대통령이 한 「악의 축」발언으로 미국과 북한, 한국과 미국, 나아가 남북한 관계까지 한바탕 요동을 치고 있다.
북한으로서는 자신들을 국제사회에서 테러와 대량살상무기 확산을 일삼는 나라로 간주돼온 이란, 이라크와 동격으로 간주하고, 악을 일삼는 무리에 끼어 넣었으니 기가 찰 노릇일 것이다.
어떡하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대접받아 외국으로부터 경제원조도 얻고 해서 어려운 경제사정을 타개해 나가야하는 처지에 이런 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김정일 정권으로서는 큰 타격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김대중정부가 추구해온 햇볕정책은 북한이 결코 테러나 일삼는 위험한 나라가 아니며 대화가능하고 상대가 호의를 베풀면 함께 호의를 보일 만한 양식을 갖춘 나라라는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런 믿음 때문에 야당 등 사회 일각에서 「퍼주기」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초지일관 햇볕정책을 추구해왔다. 이런 와중에 우리의 가장 큰 맹방인 미국으로부터 「북한은 악의 한 축」이라는 발언이 나왔다는 것은 햇볕정책에 매우 큰 타격이다.
우리 정부는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이번 발언이 한미 두 나라간 외교적 마찰로 비쳐지지 않을까 하며 파장을 진화하기에 부심하고 있다. 햇볕 정책에 대한 부시행정부의 지지는 변함이 없으며 「악의 축」발언은 9·11테러 이후 변화한 미국의 대외정책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수사적인 것일 뿐이라는 등등 의미를 축소하려 하고 있다.
여당 일각에서는 반미감정까지 들추고 나왔다. 강경 발언으로 한반도에 전쟁위기를 고조시키는 행위에는 과감하게 맞서야한다는 주장도 있다. 비정부기구(NGO)들이 나서고 진보적인 언론들이 여기에 가세했다.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연일 서로 비난성명을 내며 맞섰다. 고질적인 색깔논쟁이 가세돼 미국 대통령의 발언 한마디는 엉뚱하게 우리 사회의 잠재돼온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동족상잔의 전쟁 이후 언제, 무슨 계기로든지 건드리기만 하면 쉽게 터져 나오는 좌우 이념대립의 상흔이다.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발언이 나온 데에는 나름대로 근거와 배경이 있다.
첫째 수천명의 목숨을 앗아간 9·11테러 이후 미국의 외교정책 우선 순위가 완전히 바뀌었다. 국제테러리즘 근절이 최고의 핵심 국가전략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북한을 「악의 축」에 포함시킨 배경에 대한 미국 행정부의 설명은 9·11테러 이후에도 북한이 미사일 개발은 물론, 중동지역에 대한 미사일 수출을 계속해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핵무기 개발의혹을 받고 있는 북한이 핵사찰을 거부하고 있는 것도 이 범주에 해당된다.
두번째 배경으로는 테러사건을 계기로 「자유민주주의 대 반자유주의」의 구도로 양분된 미국인들의 세계관이 더 양극화됐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부시 행정부가 보는 북한정부는 국민들을 굶기면서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매달리고, 언론과 종교의 자유도 없는 독재국가, 이산가족 상봉도 거부하는 비인도적인 정권 등등이다. 이런 대북관이 변하지 않고 더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부시행정부의 이런 대북관을 너무 안이하게 보았거나 아니면 국내 정치적인 시각에서, 다시 말해 햇볕정책을 추진하는 김대중 대통령의 의지에 거슬릴까 봐 의도적으로 이를 경시하려고 했을 수가 있다. 부시 대통령 발언 초기 여당 일각이 보인 감정적인 대응이 대표적인 경우다.
부시 행정부가 보는 북한은 개선의 여지가 없는 불량국가다 이것은 현실이다. 이를 부정하고 「부시는 햇볕정책을 지지한다」는 수사에만 매달리다간 이번 같은 일은 다시 반복된다. 한미간에 이견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 대책을 세워나가야 한다.
북한이라는 나라는 계속 밀어 부쳐서는 해결이 되지 않고, 체면을 세워주면서 설득해야한다는 식으로 미국을 상대로 한 설득도 해야 한다.
아울러 북한에 대해서도 과거 클린턴 정부 때 써왔던 벼랑 끝 전술이 부시행정부를 상대로는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워주어야 한다. 이산가족 상봉을 받아들이고 금강산 육로관광도 하고, 또한 미사일 개발은 중단하고 핵사찰을 받아들이고 등등 진정한 변화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식의 설득에도 나서야 한다.
한겧 정상회담도 이런 시각으로 봐야 한다. 자기들만 선이라는 미국의 일방주의적인 외교적 오만을 지적하는 소리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논쟁에 머물러 있을 때가 아니다. 냉엄한 국제적 현실인식 위에 현실적인 처방을 찾아나가야 한다.
부시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거나 국내 정치적으로 유리한 면만 견강부회하는 구태는 버려야 한다. 장기적으로 한반도의 장래에 초석을 쌓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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