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북한 내에서 극도의 절망감과 박해에 대한 공포로 인해 앉아서 수동적으로 우리의 운명을 기다리느니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겠다는 결심에 이르게 됐다. 우리들 중 일부는 중국당국이 또다시 북한에 돌려보낼 경우에 대비,자살을 위한 극약도 소지하고 있다…』 『우리에게 남은 힘은 당신들에게 무릎꿇고 눈물로 호소하는 것 뿐이다…』
만난 끝에 서울에 온 북한이탈주민 25명이 지난 15일 주중 스페인 대사관으로 뛰어들면서 언론에 배포한 성명서는 사선을 넘기로 결심한 이들의 절박함이 너무도 절절이 배여있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CNN화면을 통해 소개된 이들의 스페인 대사관 진입 모습은 전격 군사작전을 방불케한다. 행동통일을 위한 듯 하나같이 검은 색, 붉은 색 야구모를 통일해 썼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저렇게 일사불란하고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었을까.
떨어져 살아도 피는 어쩔 수 없는가 보다. 겁먹은 표정으로 어른들의 틈에 끼어 넘어질듯 필사적으로 대사관 출입구를 뛰어들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안쓰러워 눈시울이 절로 적셔진다. 이들이 주린 배를 잡고 국경을 넘어 이국땅에서 고초를 겪으며 숨어지내는 동안, 그리고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겠다』는 결심을 하고 탈출계획을 짜는 동안 우리는 이들을 위해 과연 무엇을 했나 하는 자괴감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부끄럽게도 이들을 도운 것은 외국의 비정부기구(NGO)들과 벽안의 한 독일인 의사다. 이들이 도움을 청한 언론도 CNN방송과 'P통신 등 미국의 언론들이다. 베이징에 상주하는 한국 특파원이 한두명이 아니건만 이들로부터 사전연락을 받고 현장에 달려간 사람은 한명도 없다. 한국 대사관도 마찬가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한국 대사관과 한국 기자들이 알까봐 철저히 비밀을 지켰다. 한국 당국과 한국 기자들이 알면 계획이 틀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 전역을 헤매는 북한이탈주민 수는 20만에서 많게는 30만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의 서울행을 도운 독일의사 노르베르트 폴러첸씨는 『앞으로 150명의 북한이탈주민들이 추가로 지구상의 다른 대사관을 통해 한국망명을 기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폴러첸씨가 소속된 독일의 「카프 아나무르」와 함께 일본의 「북한난민을 위한 생명기금」「국제인권자원봉사자들」「RENK」(북한주민을 구하자. 긴급행동네트워크), 미국에 본부를 둔 「북한인권위원회」「민주주의 기금」등의 외국인권단체들이 북한이탈주민들을 돕고 있다. 이번에도 보았듯이 이들의 후원으로 북한이탈주민들의 망명시도는 앞으로 보다 조직적이고 집단적, 국제화될 것임을 시사한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 문제를 수수방관만 할 것인가. 베이징이나 모스크바에서 탈북자들은 우리 대사관을 찾아가도 문전박대를 당한다. 어쩌다 운좋게 선택받아 서울로 오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극히 예외에 불과하다. 외교마찰을 꺼리는 주재국과의 관계,그리고 이들을 데려와서 부양할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번에 서울로 온 북한이탈주민의 증언으로 미루어 북한의 인권상황과 경제난은 이제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오죽하면 북한으로 되돌려 보낼 경우 자살하기 위해 독약을 소지하고 있다고 했을까.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그동안 김정일 정권과의 화해를 위해 내세운 햇볕정책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북한의 인권문제를 너무 등한시한 감이 있다. 금강산 관광, 경제특구 건설지원 등의 지원책으로 북한경제를 지원하면 결국 그 혜택이 북한 주민들에게도 돌아가고 북한정권의 변화에도 기여할 것이라는 논리에도 일리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앞에 닥친 북한의 인권문제를 이제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된다. 어느 사회든 조직이든 국가든 다른 면을 제쳐두고 어느 한쪽만 기형적으로 앞서나갈 수는 없다. 인권문제가 엉망인 상태에서 경제적 지원만으로 북한이 변화의 길로 나오기는 힘들다는 말이다. 점점 더 악화되고 있는 북한 내 사정으로 미루어 북한이탈주민의 수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북한?중국간 국경의 보안체제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징후도 곳곳에서 감지된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마련을 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 한다. 중국 내 북한이탈주민들에 대한 난민지위 부여, 북한 강제송환 저지에 일차적인 외교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한국에 온 북한이탈주민들이 성공적으로 새 사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보다 세심한 지원을 해야한다. 지금같이 일정액의 정착 지원금을 지급하고 나서 내버려두는 식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서울에 온 25명의 북한이탈주민들이 성공적으로 정착해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는 물질적, 정신적 후원을 다해야 한다. 이들의 서울 생활이 중국땅을 떠도는 숱한 북한이탈주민들에게, 그리고 굶주리는 북한주민들에게 「희망봉」이 될 수 있어야 한다. 10여년 전 동서냉전의 상징이던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것은 동독이 싫다고 주변 국가로 뛰쳐나간 동독 주민들의 도도한 탈출행렬이었음을 기억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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