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형법에는 낙태죄가 엄연히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낙태 천국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신생아의 수보다 태어나지 못하고 죽는 태아의 수가 3~4배나 더 많다고 하는 것도 놀랍고, 여고생들이 교복을 입은 채로 산부인과 병원을 들락거리는 광경도 뉴스 카메라에 쉽게 잡히는 나라이고 보니 경악과 부끄러움이 함께 교차한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나라가 낙태 천국이 되어버린 이면에는 정부의 정책적인 뒷받침도 일조했다는 사실을 알면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1973년 5월 10일부터 발효된 모자보건법 시행 이후 형법의 낙태죄는 사실상 폐지된 셈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새 생명을 끊는 일종의 살인 행위가 합법화된 것이다.
「모자보건법 시행령」의 주된 내용은 임신 28주 이내에서 합법적으로 낙태가 가능한 경우를 다음의 다섯 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적 정신질환이나 신체장애가 있는 경우, 둘째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셋째 강간이나 준강간에 의한 임신, 넷째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간의 임신 경우, 다섯째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하게 해친다고 판단이 되는 경우.
이 법의 시행 이후 실제로 낙태 시술은 증가되었고, 신자들은 정신적 혼란에 빠지기도 하였다. 법이 낙태를 인정하니까 윤리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정법의 인정이 윤리적인 인정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모자보건법이 낙태를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위의 다섯 가지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것들 중에서 가톨릭 교회가 윤리적으로 정당하다고 여기는 경우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비록 모자보건법이 낙태를 허용하고 있는 그 사정들이 딱한 경우라 하더라도 그 상황이 한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것까지도 정당화할 만큼 긴박하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경제적 이유나 우생학적, 인간학적 이유들이 아무리 중대하단들 한 사람의 생명권까지 박탈할 수 있을 정도로 중대하다고 과연 어느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가톨릭 교회의 윤리는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로서의 낙태는 어떤 경우에도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유일하게 그 윤리적 정당성을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의학적인 이유로 산모의 생명이 극히 위태로운 경우 산모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태아가 죽게되는 경우뿐이다.
이 때에 적용되는 원리가 이중(二重) 결과의 원리인데 이는 어떤 선한 의도를 가진 행위의 결과로 의도되지 않은 악한 결과가 의도된 선한 결과와 함께 나타났을 때 그 악한 결과를 허용될 수도 있다는 원리이다. 그러나 악한 결과의 허용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요구된다. 곧 그 행위 자체의 의도가 선해야 하고, 악한 결과를 용인하기 위해서는 이에 상응하는 상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뿐더러 또한 악한 결과는 선한 결과의 간접적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이렇게 낙태에 대해 엄격한 입장을 견지하는 이유는 교회 스스로가 생명의 파수꾼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언제나 약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보여왔으며, 이는 스스로에 대한 최소한의 방어 능력도 가지지 못한 태아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낙태 천국의 오명을 가진 우리나라에서 우리 교회의 진정한 사명은 과연 무엇인가를 매우 진지하게 점검해보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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