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의 개인은 매일의 일상에서 타인의 경험과 의견을 매스 미디어를 통해 접한다. 전통적 혈연, 지연, 학연 등의 고리가 약해질수록 상대적으로 매스 미디어는 그 위력을 더해간다.
위력적인 공영방송 KBS는 연일 「2002년 FIFA 월드컵」 홍보에 여념이 없다. 방송이 부추긴 월드컵 열기에 전 국민이 최면술에 걸려있다. 피상적으로 볼 때, 정부가 월드컵경기를 일본과 공동 주최했으니, KBS가 선전함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축구는 국민건강과 애국심을 드높이는 구기종목으로, 온 국민이 열광할만하다. 그러나 극도의 상업성을 지닌 월드컵 개최에서 우리 나름대로 손익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월드컵 개최는 민족적 응집력 발휘와 국가 이미지 함양에 기여한 반면, 4조원이 소요된 10개 월드컵 전용 구장 건설과 그 사후 유지비 등 경제적 손실을 들 수 있다. 더 큰 손실은 열광적 스포츠 붐에서 비롯되는 소비문화의 급속한 확산이다.
전통적으로 소비문화는 환상의 세계, 이미지 등의 창출이며, 이에 따른 대리만족의 인간형을 만들어낸다. 월드컵 이벤트는 극치의 소비문화를 부추기는 행사이다. FIFA 산하 HBS는 한 게임당 20여대의 카메라를 이용하여 제작, 위성으로 송출한다. 프로그램은 전문화되고, 촬영 기법은 정교하고, 모션은 역동적이다. 환상의 세계를 자아낼 만큼 매력적이다. 카메라는 골잡이를 고르고, 골이 터지는 순간 그는 스타가 된다. 스타는 상품으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공영방송이 월드컵의 스포츠 상업화에 동조하며, 정부의 충실한 방패막이로 선봉에 나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정권의 나팔수로 비난받아 왔던 공영방송이다. 정권이 이양될 때마다 몸살을 앓아온 KBS는 여전히 경직된 위계질서, 아마추어리즘, 망라주의 문화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공영방송이 스포츠 전문 디지털 위성방송, HBS와 나란히 발 맞추어 행진한 격이다. 지상파 방송의 위상이 말이 아니다. 더욱이 정치권은 KBS의 정체성에 몇 가지 과제를 덧붙였다. 민주당은 6.13 지방선거 공약으로 지상파, 위성, 유선방송 등 방송 매체간 균형 발전을 도모한다는 명분을 세움으로써, 공영방송에게 전적으로 힘을 싣지 않겠다는 의도를 보였다. 한편, 한나라당은 이번 지방선거 공약으로 제 2TV의 민영화를 명문화했다.
방송사 노조가 방송 장악 음모론으로 한나라당에 맞서지만, 그 명분이 뚜렷하지 않다. KBS 2TV의 개국은 1980년 신군부의 인쇄매체와 전파매체의 겸영을 금하고, 방송의 공영제를 명문화한 언론기본법에서 출발한다. 그 당시 KBS 2TV는 「준교육」 방송으로 규정했으나, 교육방송이 공사화한 지금, 제 2TV는 여타 상업방송과 다를 바가 없다.
지상파 방송의 디지털화는 채널의 증감보다, 공영방송의 정체성 확립을 우선 과제로 설정해야 한다. 다매체, 다채널 시대를 감당하며, 체계적인 네트웍화를 모색할 수 있는 공영방송의 위상정립이 시급한 때이다. 현재와 같은 양상의 공영방송은 홍두표(洪斗杓) 전사장 시절에 종결지었어야만 했다. 홍 전사장은 광고료 수입과 더불어 시청료를 전기료에 부과함으로써, 인력 축소와 더불어 건전한 재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 명분상으로는 KBS 1채널을 보도, 교양물, 2채널을 가족오락, 문화채널로 정체성을 정했으나, 실질적으로 정부와 밀월관계, 기업과도 호형호제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1997년 12월, IMF 경제신탁통치가 실시됨으로써, 국가 기간방송의 위상은 추락했다. 정부, 공영방송은 국가재난을 미리 감지 못함으로써, 민중의 슬픔과 원성에 고개를 떨구었다.
정부의 이익과 상업적 이익에 눈이 멀었던 관행이 월드컵을 통해서 재현되고 있다. 공영방송은 경제제도 유지, 내부의 질서 통제, 체제유지 등 정부가 추진하는 일에 협조할 수는 있으나, 정부의 홍보보다는 언어, 문화, 전통, 자연 뿐 아니라, 외교, 국방, 교육, 남북통일 등 산적한 국가의 난제 해결에 전문적 식견을 갖고 고심해야 한다. 공영방송은 사회 각 신분집단의 요구에 적합한 밀도 있는 맞춤 프로그램을 개발해야한다. 상업 방송은 광고로 평가받지만, 공영방송은 방송문화발전과 공공복지 향상에 기여한 질 좋은 프로그램으로 위상을 정립한다.
공영방송이 정부의 나팔수 역할을 담당했다지만, 6.13 지방선거의 투표율은 48.9%에 불과하며, 집권당의 광역단체장 점유는 불과 4개 지역(총16지역)에 그쳤다.
결과적으로 집권당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KBS라면, 정부도 공영방송을 전문 국가기간 방송으로 독립시킬 필요가 있다. 국민은 정부의 붙박이식 공영방송을 더 이상 감당하기를 원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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