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시인의 신간 시집 「뿔」의 뒷표지에 짤막한 평이 실려 있다. 『이제 득의 만면한 표정이 되어도 좋을 그의 시의 얼굴에 아직도 그늘이 어려 있다. 상처 없이 어떻게 시이겠는가. 상처까지도 아름답다』
시집 「농무」 이래 문단의 정상에 오른 신경림에 대해 역시 시인인 정희성이 평문의 끝줄에서 한 말이다. 이 말을 빌어서 더 넓은 의미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상처 없이 어떻게 문학이겠는가. 또는 상처 없이 어떻게 인생이겠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상처까지도 아름답다고 했다.
이것은 문학이라든가 신앙의 차원에서 가능한 말이다. 그러나 사람이 겪는 마음의 상처들 중에는 끝내 아름답게 이해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폭력을 당했을 때가 그러한 경우이다. 폭력 중에는 말에 의한 폭력도 있다.
용서는 해도 잊지는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 잊지 못하는 것이 폭력의 흔적이다. 말이 사랑이 되면 시가 된다. 반면에 말이 폭력이 되면 독이 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지난 8일 국회에서 일어난 일이다. 국회의원 총선거가 끝나고도 의장단 선출이 늦어지다가 이 날에는 어떻게 해서든 의장단과 상임위원장들을 선출해 새 국회를 가동시켜야 하는 날이었다. 원칙적으로는 의장단의 자유 투표제 선출이 합의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막상 선출 투표에 임박해 각 정당은 내세울 인물을 조율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논의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한 것 같다. 그 경위의 세세한 내용은 일반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못된다.
그러나 그날의 국회 현장에서 있었던 특이한 장면들 자체가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양대 정당별로 그 현장을 보면 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언론기관들이 보도를 했다.
민주당에서는 원내 부총무인 송모 의원이 같은 당의 10여년 선배 되는 조모 의원에게 극단적인 욕설을 퍼부었다. 『개XX』를 비롯해 지면에 옮길 수 없는 폭언을 했다. 조모 의원은 당에서 한 때 당기위원장과 최고위원을 역임한 중진 의원이다. 그런데 이제 재선 정도 되는 소장 의원이 대선배에게 극단적인 폭언을 한 것이다.
같은 날 한나라당에서도 강모 의원이 같은 당의 원내 총무인 이모 의원에게 『개XX』, 『한번 붙어 볼래』하는 폭언을 했고, 이어서 두 의원은 윗도리를 벗고 육탄전을 벌이려 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의 욕설이 주변 의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제지당하지도 않았고 당기위원회에 회부할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은 것이다.
국회법에 의하더라도 국회의원이 품위를 손상시키는 일을 저질렀을 때엔 윤리특위를 통해 제명을 하는 중징계도 가능하게 되어있다. 그런데 폭언과 폭력에 대한 불감증에 걸린 듯 국회 안에서는 때때로 부도덕한 행패들이 예사롭게 발생하고 있다.
특히 지금은 어떠한 때인가. 2002년 월드컵 경기를 성공적으로 마친 때이다. 경기 실력으로도 한국이 4강에 진출할 만큼 대약진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성과는 한국의 이른바 「붉은 악마」라고 하는 응원 군중의 품위 높은 행동이었다.
한국팀의 마지막 3, 4위전 경기가 있던 날엔 전국적으로 750만명 정도의 응원 군중이 각 도시의 광장과 가두를 꽉 채웠었다.
그런데 이 많은 수의 응원 군중 속에서는 무질서와 폭력의 사고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이겼거나 졌거나 다만 축제의 분위기를 연출해 수많은 군중이 환호할 뿐이었다. 응원이 끝나고 헤어질 때엔 주변의 청소까지 말끔히 되는 것이었다. 전 세계의 여론이 한국의 이 놀라운 응원 문화를 가리켜 「세계에서 으뜸」이라고 찬사와 선망을 보냈다.
응원 군중의 대부분은 20대와 30대의 젊은 층이었다. 전체적으로 자발적 참여였고 남성에 못지 않게 여성의 참여도가 높았다.
바로 이들이 대한민국의 오늘과 내일에 걸친 주인 세대였던 것이다. 누가 이들을 이만큼 가르쳤고 키웠던가. 이들은 스스로 자라난 역사의 아들과 딸이며 민중의 본질이며 실체였다.
「붉은 악마」 세대에 비해 구세대에 속하는 이들이 지금 이 나라의 정치를 맡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걸핏하면 욕설과 폭력의 난투를 벌인다.
「말」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존재 자체라 할 만큼 존엄한 것이다. 『말이 순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言不順則事不成)』 동양의 공자도 한 말이다. 우리의 미래와 희망은 말을 진실되게 하는데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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