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값을 포함에서 20만원으로 한 달의 모든 것을 해결해야만 했던 가난한 유학시절, 주말에만 가서 보좌신부 역할을 하던 성당에서 주일미사를 드리기 위해 앞좌석에 꿇어앉아 묵상을 하고 있었다. 인기척이 있는 듯하여 옆을 보니 집시소녀가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고 있었다. 지갑을 열어보니 만원짜리 두 장이 있었다. 당시 만원은 나에게도 큰돈이었다. 뒤에서 교우들이 다 보고 있는데 그냥 보낼 수도 없다. 큰마음 먹고 하나를 꺼내 주었다. 그러나 그 소녀는 그대로 서서 손을 내밀고 있었다. 하나 남은 것마저 달라는 표현이었다. 이번에는 뒤에 있는 교우들을 의식할 여유가 없었다. 『나도 필요해!』 짤막하지만 충분히 강한 어조에 감을 잡은 눈치 빠른 그 소녀는 그제야 떠나갔다.
부자집 맏아들로 태어나 부푼 야망을 키우다가 전쟁포로로 잡혀 상당기간 옥살이 중에 부자인 아버지 덕분으로 몸값을 내고 풀려난 프란치스코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가 가진 재산을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다가 아버지로부터 얻어맞기도 했고, 마침내 아버지로부터 고발당하여 주교 앞에 서서 재판을 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그는 입고 있던 옷마저 아버지께 내어주고 알몸으로 새 삶을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지구촌의 모든 인류로부터 존경받는 성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외적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가진 것을 나누어 줄줄만 알았던 그는 영양실조와 각종 질병에 시달리며 고생하다가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프란치스코가 처음부터 자신의 아버지처럼 땀흘려 일을 해야만 먹고살 수 있는 처지에 있었더라도 여전히 같은 삶을 살았을까? 그것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하여간 나눈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고, 간단한 일도 아니다.
힘들여 일을 하여 벌어들인 것을 남에게 선뜻 내줄 수 있는 사람은 상당히 성숙된 사람이다. 그는 내준 것만큼 다시 땀을 흘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감당할 각오를 한 것이다. 남에게 주는 것을 몹시 좋아하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삶마저 곤경에 빠뜨리고 마는 경우도 있다. 이제부터 그는 다른 사람의 나눔에 의지해야만 한다.
남에게 나누는 행위는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남에게 나누어주거나 도움을 줄 때 우리의 두뇌 속에서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하고 생명을 활발하게 살리는 좋은 물질이 분비되어 우리를 번성하게 한다. 그러나 나눔도 뒷감당이 어려울 정도로 지나치게 하면 미래에 대한 불안이 찾아온다. 성인들은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나누어주었다고 하지만, 일상에서 이러저러한 체험을 한 범부들은 자신과 가족의 앞날에 대한 염려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나눔의 미덕에 대해서 가르치고 권하는 교회마저 교회의 유지와 선교를 위해 적지 않은 재산을 가지고 있고, 나눔의 미덕에 대해 가르치는 순간에도 그것을 몽땅 팔아서 나누어주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미덕이기만 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교회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국가에서는 오히려 면세로써 교회의 재정을 도와준다.
나와 너, 모두 소중한 목숨이다. 이 소중한 목숨을 모두 살리는 나눔에는 섬세한 고려와 강한 정신이 필요하다. 어떤 때는 아까워도 내주어야 하고, 어떤 때는 내주고 싶어도 자제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의 형태가 넓게 볼 때에는 가짐과 나눔에 있어서 중용의 미덕을 지키고 있는 삶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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