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따라 이리저리 떠돌다 계룡산 밑자락 주막에서 며칠 몸을 뉘었다. 그러다 어느 날 꿈을 꿨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옷이 벗겨진 채 컨테이너 같은 것에 실리고 있었다. 컨테이너 속은 점차 지옥처럼 변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벽을 치며 살려달라고 외쳤다. 그 고함은 시간이 좀 지나는 듯하자 잠잠해져 갔다. 사람들은 목을 축이려는지 서로 땀을 핥고 있었다. 컨테이너를 실은 차는 한참을 달려 어딘가에 도착하는 것 같았다. 운전사가 컨테이너 문을 열자 축 늘어진 시체가 생선들처럼 쏟아져 나왔다」
또 하루는 이런 꿈을 꿨다.
「멀리 산도 보이고 집들도 보이고 어딘진 잘 모르겠지만 그다지 내게 낯설지 않은 곳이었다. 그런데 마을 전체가 물에 잠겨 있었다. 전봇대 같은 것만 머리를 삐죽이 내밀고 있고 지붕 같은 것도 좀 보였다. 그 물 위로 사람들이 보트 같은 것을 타고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 쪽에는 수많은 돼지들의 시체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울고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넋을 놓고 있었다」
앞의 꿈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다룬 뉴스위크 최신호의 내용을 각색한 것이고, 뒤의 꿈은 이번 수해로 물에 잠긴 김해시의 어느 마을 모습을 각색한 것이다.
미국 정부와 국제단체들이 탈레반 포로들 천 명 이상을 의도적으로 살해한 혐의가 짙게 배어나고 있다고 하는, 위의 꿈과 같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말할 것도 없이, 김해의 물난리도 어쩜 논산에 머물고 있는 내 입장에선 꿈처럼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내가 여기서 피정지도를 하면서 겪어내고 있는 일들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꿈처럼 다가올 터이다.
내게 엄연한 현실이 다른 이에겐 꿈이고 다른 이에게 너무나 분명한 현실은 내겐 꿈이다.
그런데 자지 않는 이가 있는가? 당연한 결과로 꿈꾸지 않는 이가 있는가? 바로 이 꿈과 현실 둘 다 모두가 내 존재를 구성하고 있지 않은가. 몸과 마음이 한 짝인 것처럼, 의식과 무의식이 한 짝인 것처럼, 현실과 꿈 또한 한 짝이다. 그리고 이 한 짝인 것들은 둘로 나눌 수가 없다. 나누게 되면 둘 다 죽어 버린다.
이처럼 현실과 꿈이 둘이 아니고 하나다 보니 내 꿈을 지니고 있는 너랑 내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나랑 역시 둘이 아니고 하나다. 이 또한 둘로 나눌 수 없는, 만약 나누게 되면 둘 다 죽고 말게 되는 한 짝이다. 영적으로 미개한 수준에 머물고 있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온갖 아픔과 고통과 슬픔이 바로 여기서 비롯되고 있다. 꿈의 너른 바다 위에서 자그마한 섬처럼 현실이 드러나고 있음을, 섬이 바다의 떠받침 위에 자리하고 있음을 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꿈과 현실을 쪼개 버리듯 나와 너를 철저히 분리시킨 채 완전 별개 독립의 존재로 알아듣는다. 근원적으로는 하느님과 인간을 분리시켜, 나는 하느님 안에 없고 하느님 또한 내 안에 없다.
한국 땅덩어리 안에서, 심지어 지구 저 끝 쪽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그토록 사려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무의식이 의식을 떠받들고 있는 것처럼, 꿈이 현실을 떠받들고 있는 것처럼, 대한민국의 후미진 곳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이, 세계 각처에서 일어나는 파장들이, 그대로 내 존재의 깊은 생명의 근원에서 올라오는 사인들이다.
더구나 그 사인들은 미처 내 의식이, 현실감각이 붙잡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완성시키며 내 생명을 키워나가는 데는 오히려 더 중요한 것들이다. 이 세상 전체가, 우주 전체가 완전한 하나의 생명, 하나의 몸, 하나의 영혼을 누리고 있음에 대한 절박한 인식이 필요하다.
무의식의 광활한 세계에 비해 의식의 세계가 지극히 작은 것처럼, 내가 관여하고 움직이는 현실은 이 세상 전체에 비하면 턱없이 작다. 함에도 이 세상과 나는 완전히 하나로 결합되어 서로 간에 깊은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보도되고 있는 우리 사회 내지 지구 전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두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현실과 꿈을 통합시키고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시키는 가운데 참된 나의 행복을 일궈내기 위해서다.
그 기도 안에서 새로운 나의 모습을, 새로운 우리의 모습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그렇게 빚어낸 나의 행복이 너의 행복이고 그들의 행복이고 하느님의 행복이다.
법대로 살았던 성 요셉이 꿈에 주의 천사가 일러주는 대로 성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던 것처럼. 가브리엘 대천사가 일러주는 이야기를 참으로 믿었기 때문에 태중의 아드님과 함께 정녕 복되셨던 성모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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