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에서 영화 한 편을 보다. 오아시스! 빛고을을 떠나 한양을 거쳐 달구벌까지 내려와 한가위를 끼고 수녀님들 피정을 주려는데 피정 들어가기 전에 시간이 남았다. 대학을 다닐 때는 데이트의 빌미를 잡기 위해서라도 영화보기를 좋아했다. 허나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넘어온 후부터 거의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요즘 들어선 의도적으로 영화를 좀 가까이 하려 한다.
영화니 문학이니 조각이니 이런 예술 내지 문화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모습을 해독해내고 싶기 때문이다. 비단 신학적 이론을 통해서만 하느님께 다가갈 것이 아니라, 매일 먹고 마시며 부딪히는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한복판에서 하느님을 읽어 들임으로써 하느님과 우리 자신을 한몸으로 엮어내는 통로를 발견하기 위함이다. 우리의 삶과 신앙을 하나로 묶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날 사로잡는다.
그저 취미로 영화를 볼 뿐인지라 그럴 듯하게 영화에 대한 논평을 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된다. 함에도 이 「오아시스」라는 영화는 다양한 입지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끔 만든다. 적어도 내 눈에는 남자 주인공인 홍종두(설경구 분)를 통해 궁극적으로 인간 존재의 본디자리가 어디인지, 나라는 존재의 참된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다가온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존재를 통해 우리 인간 존재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보여주셨던 것처럼.
이를 위해서는 각 상황에서 드러나고 있는 홍종두의 얼굴 표정을 유심히 바라볼 필요가 있겠다. 한 인간의 내면의 어우러진 아름다움은 얼굴을 통해 가장 정확하게 드러날 수 있겠기에. 여기서 그 표정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두드러진 한 가지 모습은 소위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고통이라는 것에 직면했을 때의 표정이다.
거기엔 악에 대항해 선을 창출하려는 결연한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원망도 한(恨)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거나 오히려 편안한 모습이요 어눌한 몸짓을 택하고 있다. 웃고 있을 때의 모습도 독특한데 그저 단순히 단세포적인 욕구 충족에서 비롯되는 웃음만의 웃음이 아니다. 오히려 약간의 슬픔이, 아픔이 물들여져 있다.
이런 모습들을 빚어내는 가운데 행동을 취해 나가는 모습은 대자유인(大自由人)이다. 인간들이 쳐 놓은 눈금을 좇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들려오는 영혼의 감각을 좇고 있다. 영혼의 자리, 우리 인간의 참된 근원자리, 온전한 생명의 자리에서 울려나오는 주파수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그러다보니 반듯하게 정돈되어 있고 규칙이 있고 위계질서가 엄연한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우리의 눈에 위험하게 보인다. 이런 모습의 전형적인 인물이 예수님이었다. 그분은 오히려 악을 행하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처럼 느껴졌다.
물론 홍종두가 예수님과 같은 인물로 부각되거나 다가오진 않는다. 어눌하고 어설프고 세련되지 못하며 거친 장면이 한둘이 아니다. 함에도 예수님과 같은 생명의 계열에 속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듯하다.
우리가 도달할 모습도 실은 홍종두 쪽에 더 가까울 것이다. 비록 존재의 근원자리에서 나오는 울림에 좇아 움직이고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만큼 철저한 자각 위에 움직이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도 영혼의 내적 생명의 이끌림에 좇아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모습은 소위 정상인들의 눈에는 위태위태해 보이고 파괴적으로 보이고 추하게도 보이며 죄인으로 낙인찍히기도 할 터이다.
홍종두를 통해 드러나듯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실제 생활을 살아내기엔 버거운 여러 약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결코 경시할 수 없는, 경시해서도 안 되는 것이 바로 영혼 내지 영(靈)에 좇은 생명의 삶이고 자유의 삶이다. 영화에서 홍종두와 한공주(여자 주인공, 문소리 분)를 제외한 다른 모든 주변의 등장인물들, 우리들에게 너무나 친숙할 뿐만 아니라 의당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생명을 느낄 수는 없었다.
설혹 인간이 만들어 놓은 예의와 법도와 질서에 좇아 움직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아무리 정교하고 아름답다 하더라도 그건 조화(造花)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투박해 보이고 정돈된 일상을 교란시키는 듯 보이고 덜 아름다워 보일지 몰라도 생화(生花)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온갖 예의범절, 윤리도덕 규범, 가치질서 등이 늘 참된 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영혼은 그 모든 것을 내포하면서도 뛰어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쯤에서 홍종두와 한공주가 존재의 일치와 조화를 이뤄내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근엄하고 올바른 우리는 강간으로 규정짓고 말았다. 그렇게 심판함으로써 정작 심판 받아야 할 사람과 대상이 무엇인지가 드러났다.
이 영화를 보며 부모들이 자녀들을,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성직자나 수도자들이 신자들을, 모든 기성세대들이 청소년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이끌며 교육시켜야 할지 깊이 생각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