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적인 기분으로야 아직 젊다. 허나 객관적으로는 그렇게 봐 주지 않는다. 머리가 허옇다 보니 지하철을 타면 곧잘 자리 양보까지 받는다. 적이 쑥스럽다. 근데, 이 나이가 되도록 뭐 하나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부끄럽다. 이 와중에 그나마 좀 잘했다 싶은 것 하나가 늘그막에 운전면허를 땄다는 사실이다.
빛고을로 파견되면서 사도직의 필요성 때문에 장상의 권유에 의해 따게 되었지만 정말 잘 했다 싶다. 운전을 둘러싸고 얼마나 많은 영성적 성찰을 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자동차라는 것이 그저 운송 수단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닮은 우리가 창조해 낸 중요한 생명체로서 나의 생명과, 우리의 생명과 하나를 이루고 있다.
놀라운 기동력과 안락함을 갖춘 생명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차체 자체는 또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가. 인간의 몸이 그러하듯. 똑같은 차일지라도 그 주인이 어떻게 가꾸고 닦아 나가느냐에 따라 얼마나 성능이나 수명이 달라지는가. 인간이 교육을 통해 변화하듯.
자동차를 일단 도로 위에 올리는 순간 어떻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들이 한 몸을 이루며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지 온 몸으로 알아듣게 된다.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자동차들 상호간에는 말할 것도 없고,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 주위에 놓여 있는 물건들, 이 모든 것들이 있어야 할 때에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면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상처를 입고 혼란이 초래된다. 어느 도로 상에서의 사고는 차량 정체 현상을 초래하며 도로망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마치 내 몸의 한 부위가 아프면 내 존재 전체에 영향을 미치듯. 비록 사고는 아니라도 신호위반을 하고 무리한 끼어들기를 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파장도 멀리 멀리 영향을 미쳐 나간다.
이렇게 한 몸을 이루며 형성되고 있는 자동차 운전을 보면 법이란 따로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지켜야만 하는 갖가지 교통법규들이 있다. 함에도 그런 것들은 모두 부차적일 따름이다. 오직 법이라고 남는 것은 생명의 법 하나 뿐이다.
「지금 이 자리」라는 구체적 상황 속에서 생명을 지키고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최선인가 하는 법만이 운전자들을 구속하게 된다. 비근한 예로 자동차는 직진해도 좋다는 녹색 신호가 떨어져 있는데도 보행자가 신호를 무시한 채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을 때 어느 운전자가 녹색신호가 켜져 있으니 가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차를 몰아 사람을 치겠는가.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근원적인 욕구가 앞서기 때문이다.
이처럼 운전을 해본 사람이라면, 아니 다만 버스나 택시 등을 타 본 사람이라면 자연히 알 수 있는 진리가 바로 이것이다. 그저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전체적인 교통의 흐름에 잘 순응하는 것이 더 중요하며 그러는 가운데 생명의 소통이 더 활발하게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 최종의 목표임을. 교통법규라는 것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교통법규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님을.
이러한 관점에 설 때 우리의 인생살이 내지는 신앙생활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 감이 잡힌다. 우리의 삶을 다스리고 있는 온갖 윤리 도덕적 규범과 관습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해야 할지 방향감각이 생긴다.
사회의 그런 규범들을 충실히 좇아가느라고 사람의 살아있는 기운, 생명력을 감퇴시켜 나가서는 안 된다. 우리 각자의 고유한 아름다움과 생명력이 그런 규범들에 의해 얼마만큼 시들어 버렸고 상처 입었는지를 돌아보면 화가 난다. 운전을 할 때와 똑같이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을 살아내는 우리에게 있어서 유일한 규범은 생명의 법밖에 없다. 생명의 법이 사랑의 법이고 자유의 법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법이다. 모두 같은 말이다. 다른 측면들을 건드리고 있을 뿐.
끝으로 생명의 법만을 염두에 두고 운전하는 사람들은 「지금 이 자리」라는 구체적 상황에 늘 깨어 있으며 현재의 삶에 지극히 충실하다. 설사 5분 전에 차선위반으로 사고를 낼 위험을 겪었다 손치더라도 그 상황에 묶여 있지 않는다. 그렇게 과거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현재 신호등의 변화나 차량의 흐름에 깨어 있지 않으면 더 위험한 사고를 일으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발생했던 체험은 그저 앞으로 좀더 유념하고 조심하는 가운데 신중하게 운전을 해 나가기 위한 자료로 삼기만 하면 된다. 동시에 앞으로 5분 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누가 갑자기 차선으로 뛰어들지나 않을까 하는 따위를 미리부터 염려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 주어지는 상황에만 민감하게 깨어 있으면서 거기에 대처하며 운전해 나갈 따름이다.
이러한 모습들이 바로 우리가 인생을 걸어가는 길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충실하게 깨어 있는 가운데 생명의 흐름을 좇아 그 생명을 더 크게 키워나가는 쪽으로 본능적으로 움직여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의 잘못이나 죄에 사로잡혀 지금 신음하지 않는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염려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가 흘러들어와 있는 「지금」을 살아낼 뿐이다. 그것이 영원히 죽지 않는 삶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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