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회는 해마다 11월을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위령 성월로 지내고 있다. 그래서 11월은 우리 곁을 떠난 부모나 친지의 영혼, 특히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치며 자기 자신의 죽음도 묵상해보는 특별한 신심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전례력으로 볼 때 연중 마지막 시기에 속하는 이 달을 위령 성월로 지내기 시작한 것은 일찍이 1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998년에 클뤼니 수도원에서는 매년 11월 2일을 위령의 날로 지내기 시작했고 이것이 널리 퍼지면서 이 한 달 동안 위령 기도가 많이 바쳐지게 된 것이다.
그 후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와서 교황 비오 9세와 레오 13세, 그리고 비오 11세가 위령 성월에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를 하면 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위령 성월의 신심은 더욱 널리 퍼졌다.
연옥에 대한 교리와 함께 위령 성월 신심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근거는 「모든 성인의 통공에 대한 교리」이다. 연옥에서 고통 받는 영혼들을 위해 살아있는 사람들이 기도를 바치고 반대로 하느님 나라에 이미 들어가 있는 성인들이 지상의 순례를 계속하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 간구함으로써 산 이와 죽은 이의 통교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서 하느님 안에서의 사랑과 일치,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는 것이 바로 위령 성월의 참 의미이다. 그리고 죽음으로써 오히려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를 가장 절절하게 깨달을 수 있는 시기도 바로 위령 성월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을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오히려 죽음을 딛고 일어서는 생명의 가치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죽음의 문화」가 더 이상 하느님이 선사한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현대 세계에서 생명의 가치는 자칫 땅에 떨어질 위기에 처해 있다. 수많은 무죄하고 무력한 어린 생명들이 원하지 않는 임신이라는 변명 아래 살해되고 있으며 혈육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으로 대리모가 횡행하고 있으며 생명의 신비스러운 영역을 인간이 어찌해볼 수 있으리라는 아둔함으로 창조주의 영역을 침범하려 한다.
위령 성월은 죽음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때이다. 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와 희생과 보속의 삶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참여해야 할 우리는 오늘날 세상을 뒤덮으려는 죽음의 세력에 대항해 참 생명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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