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역사적인 존재이다. 현대문명은 과거 수만, 수천 년 동안 인류의 경험과 탐구정신의 결과이다. 오늘의 나의 모습은 선조와 부모님이 물려준 삶의 조건과 나의 노력의 결과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과거는 언제나 따라다녀 결코 지울 수 없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이다.
어느 한 국가를 방문하면, 그곳에 그 국민이 살아온 과거의 모든 것이 진열되어 있다. 도로, 다리, 공항, 항만, 건물, 학교, 문화 등 모든 것이 그 국민이 살아온 보습을 반영한다. 어느 한 가정을 방문하면, 집의 정돈 상태, 먹는 음식, 주고받는 대화의 내용 등에 그 가족들이 살아온 삶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내 안에도 나의 과거가 깊이 각인되어 있다. 나의 의식과 습관적인 행동 양식, 선호하는 음식과 문화,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의 단어 하나 하나가 모두 나의 지난 삶의 모습을 반영한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과거 역사로부터 결코 해방될 수 없다. 그것은 벗어나야 할 존재가 아니라, 인정하고 받아들여 그 바탕 위에 나의 삶을 구축해 나가야 할 삶의 토대이다. 그래서 『나는 왜 좀더 훌륭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지 못했는가』, 또는 『나는 왜 이 분단국가에 태어나 이 고생을 하고 있는가』라는 불평을 할 수는 있는 것이지만,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이것은 받아들이고 수용함으로써만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존재의 기본바탕인 것이다.
그러나 과거는 현재가 아니다. 과거의 자취는 남아있지만, 과거라는 시간 자체는 없는 존재이다. 실재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현재, 이 순간뿐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 과거에 대한 추억과 정보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그것은 두뇌 속에 잠재된 것일 뿐 현실은 아니다. 아무리 많은 자취를 남겨 두었다고 하더라도 과거라는 시간은 이미 흘러가고 없는 것이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 과학이 아무리 발달한다 하더라도,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타임머신은 개발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삶이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구성 요소들 중 하나인 인과율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미래에 그런 기계가 개발될 수 있을 것이라면, 현재 이 순간에 그런 기계를 타고 등장한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미래에 그런 기계가 등장할 것이라면, 그 기계를 탄 사람이 그에게 있어서 과거 중 하나인 이 시간으로 돌아오고자 할 것이 때문이다. 현재 그런 기계를 타고 나타나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그런 기계의 개발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과거에 했던 경험들을 다시 회상해 볼 필요가 있을 때가 종종 있다. 오늘의 삶에 대한 지혜를 얻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잦아 과거 속에 묻혀든다면, 현실의 중압감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한 때 화려했던 과거 속으로 도피해든다면, 과거에 입은 상처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언제나 그 영향권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면, 과거에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여 오늘 이 순간을 분노와 원망으로 살고 있다면, 그런 삶은 실제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없는 허상을 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고,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해야 하는 수준이 낮은 삶이다.
나는 과거나 미래에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 순간에 살아 있다. 이 점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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