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流刑)!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를 왔던 먼 남도 강진에서 이 글을 쓰네. 강바람이 매섭게 나뭇가지를 흔들고 창문을 두드리고 있네그려. 찬바람과 더불어 이 몸도 한기를 앓고 있네. 이제 갈 날이 멀지 않아 그런지 모든 게 뿌옇게 보이기만 하네. 이전엔 너무나 또렷하게 분별이 되었던 게 말일세. 똑똑한 녀석과 멍청한 녀석이 엄연히 달랐고, 아름다운 아낙과 못난 아낙에 선을 그을 줄 알았고, 진리와 허위가 확연했고, 정의와 불의도 선도 악도 분명히 구분지어 졌었네.
헌데 요즘은 이 모든 경계들이 깊은 어둠 속에 잠기는 가운데, 전혀 달랐던 그 둘을 싸잡아 안은 묘한 아름다움과 따뜻함이 푸른 빛 도는 안개 속에 피어올라 마른 재처럼 푸석거리는 이 육신을 휘감아 돌고 있네. 마지막 불꽃을 사르고 꺼질 것 마냥.
수능시험도 이제 끝이 났나 보네. 신문 한 쪽을 보면 수능시험과 더불어 검찰의 물고문에 의한 치사사건 기사도 있네. 두 가지 뉴스를 동시에 접하며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들지 않을 수가 없었네.
살인죄의 혐의를 받고 있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피의자와 좋은 대학을 나와 사법시험을 통과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검사는 우리네 눈에 정말 얼마나 달리 비치겠는가. 하늘과 땅이 먼 것처럼, 아예 애초부터 왕후장상의 씨가 다른 것처럼 말일세.
인권의 마지막 보루 운운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진부해 오히려 역겹기조차 하지만 아직 그런 표현을 써대며 검찰을 비난하고 있는 언론이나 여론 또한 내겐 전혀 울림이 없네. 수능시험을 잘 보려고 혈안이 된 부모나 선생들 그리고 학생들, 이게 바로 우리 모두이고 이 사회 전체이지만, 바로 이 우리들이 치밀한 계획 하에 만들어낸 걸작품이 검찰의 물고문에 의한 살인사건이고 온갖 투기를 비롯한 거액의 부정축재사건이고 권력의 향배를 좇아 온갖 권모술수를 마다 않는 작태들이 아닌가.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셔 놓고선 그 다음날 아침 배가 쓰리고 아프다고 해서, 그 정도도 소화를 못 시켜 내는 나쁜 놈의 뱃속이라고 욕을 해댈 수 있겠는가.
유형(流刑)! 갈수록 절실히 내게 다가오는 것은 그동안 참으로 내가 교육을 헛 받아왔다는 생각이네. 사람을 아름답게 살려내는 교육을 받아온 것이 아니라 처참하게 죽여 없애는 교육을 받아왔네. 똑똑하고 잘난 나 내지 우리만 있을 때 완전함과 아름다움을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멍청하고 못난 너 내지 너희들이 우리랑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아름다움과 완전함을 이뤄낸다는 점은 강조되지 않았네. 심지어는 들어본 적도 없는 이들도 있네.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똑똑하고 잘난 내가 살기 위해선 멍청하고 못난 네가 있어야 했네. 그것도 나와 똑같은 비중과 가치를 지닌 채 말일세. 이거야말로 수긍하기 어렵고 분통터질 노릇이 아닌가.
함에도 그것이야말로 참된 진리였네. 질병을 싸잡아 안고 있는 건강이 비로소 참된 건강임을, 죽음을 싸잡아 안고 있는 생명과 삶이 비로소 참된 생명이요 삶임을, 악을 싸잡아 안고 있는 선이 비로소 참된 선임을, 죄인을 싸잡아 안고 있는 의인이 비로소 참된 의인임을 알아듣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네. 엉뚱한 수학공식과 영어단어와 잡동사니 지식을 퀴즈 게임하듯 순발력 있게 써먹는 기술들 익히느라고 그 따위 것들은 어깨 너머로라도 살필 겨를이 없었네.
유형(流刑)! 자네도 알걸세. 자네가 진정 마음이 따뜻한 가운데 힘이 나고 위안을 얻고 기쁨을 누렸던 때는, 놀라운 학문적 업적을 쌓았을 때도 아니요 사업이나 사도직을 거창하게 일으켜 세웠을 때도 아니요 높은 지위에 올라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을 때도 아녔단 사실을.
물론 자족감에서 오는 기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에 비해 경쟁과 긴장과 초조에서 오는 어려움이 훨씬 더 컸었던 사실을.
정말 평안한 가운데 기쁨과 힘을 누렸던 때는 오히려 그저 동료가 따뜻한 미소 속에 한 마디 말을 건네줬을 때였고, 일과 경쟁을 떠나 사랑하는 이와 함께 조용히 차를 나눴을 때였음을. 이렇게 값없이 사랑받고 있을 때 비로소 난 참된 위안과 힘을 얻었고 이 삶의 추위와 쓸쓸함을 견뎌낼 수 있었다네.
예수라는 아저씨는 이 점에 있어서 탁월한 분이셨네. 두려움과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는 이들이 그 분과 접하면 새로운 생명과 힘과 희망을 길어 올리곤 했었네.
유형(流刑)! 우리의 이 한 생이, 다양한 모습으로 점철된 이 삶이, 그저 하나의 과정으로 다가오네. 스스로가 나왔던 근원을 향해 되돌아가는 여정 속에 만나는 온갖 풍광으로 말일세. 선함도 악함도, 아름다움도 추함도 따로 구분되지 않고 그저 전체로서 하나 되어 아름다움과 생명을 뿜고 있는 넉넉한 자태로서 말일세.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기쁨이 번지는 가운데 걸어갈 힘이 솟게 하는 건 바로 그 근원자리였었네. 밉든 곱든 잘났든 못났든 품에 안고 가는 에미의 사랑처럼 말일세.
유형(流刑)! 요즘 부쩍 에미 품에 안겨 있고 싶네. 에미의 젖꼭지를 빨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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