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이 다가왔다.
크리스마스 캐럴, 화려하게 장식된 성탄 나무, 갖가지 모습으로 꾸며진 구유,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구세군의 자선냄비와 종소리 등이 삭막한 이 겨울을 그래도 훈훈하게 해준다.
정작 아기 예수의 성탄은 오늘날 우리들이 꾸민 구유처럼 포근하거나 아름다운 탄생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기를 낳을 곳이 마땅하지 못해 겨우 찾아낸 동굴이거나 짐승들의 우리를 탄생지로 삼은 예수의 성탄은 이 세상의 삭막함을 반영하는 것이었으리라. 우리 주변에도 이 겨울에는 추위를 이겨낼 수 있는 월동 준비를 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성탄 선물을 주고받을 만한 여유도 없는 가난한 사람, 그리고 소외된 사람들도 많다. 수많은 게이트 사건이 터질 때마다 수억의 돈이 새어 나갔다는 뉴스나, 백화점에서는 고가품일수록 품절 현상을 보인다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느끼는 서민들의 상대적 빈곤감은 더욱 컸으리라 여겨진다.
보좌 신부 시절 본당 신부님의 한 가지 강론이 오래 동안 내 마음에 남아 있다. 구태여 제목을 붙이자면 「어느 재수없는 하루살이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여름날 하루살이가 태어났더란다.
하필이면 그 날은 하루 종일 비가 오고, 바람 불고, 천둥이 울고 벼락치던 날이었더란다. 우리의 인생에는 비 오는 날도 있고, 맑은 날도 있겠지만, 그 하루살이는 평생 비가 오고 바람불고, 천둥이 울고 벼락이 내리치는 셈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재수 없는 탄생이었던가!
그 하루살이의 탄생을 생각하면서 나의 아버지 세대를 생각해 보았다. 김수환 추기경님만 해도 그렇다. 일제 시대에 태어나 학병으로 끌려가서 전쟁을 치러야 하셨다.
그 세대는 겨우 해방이 되었나 싶었는데 또 다시 6?25라는 혈육간의 남북 전쟁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다시 남북분단으로 「빨갱이」, 「미제 앞잡이」로 몰아 세우며 싸웠던 얼룩진 유혈의 역사를 거쳐, 북은 「천 삽 뜨고 허리 펴기 운동」, 남한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라는 미명 하에 새벽종소리를 듣고 일어나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새마을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한편 유신정권과 군사독재 하에 숱한 어려움을 겪고 이제 겨우 민주화 시대, 마이카(My car) 시대를 맞이하였는가 싶었는데 인생의 황혼이 되었다. 이러한 나의 아버지 세대야말로 재수없는 하루살이의 탄생과 다름없다.
예수님 역시 다르지 않다. 로마의 식민지 국가 이스라엘에서, 더욱이 아우구스토 황제의 인구조절정책이 펼쳐지던 때에 많은 유아들이 살해되던 틈바구니에서 태어나 멀리 이집트로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해야 하셨다.
로마제국 법정이 내린 사형 선고로 젊은 나이에 반역죄의 누명을 쓰고 십자가에 처형됨으로써 생을 마감하셨던 예수님의 일생이야말로 재수 없는 하루살이의 탄생과 다를 바 없지 않는가?
인간을 사랑하신 이유가 아니라면, 하느님의 신분을 벗어버리고 인간으로 태어난 예수의 육화 자체가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불운한 시대에 불운하게 태어난 예수 성탄은 과연 우리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일까?
일찍이 프랑스 시인 샤를르 뻬기는 날카롭게, 그리고 정확하게 인간의 현실을 지적하였다.
『성공 속에는 어떤 불순함이, 승리 속에는 비열함이, 행운 속에는 적어도 어떤 형이상학적인 불순함이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위대한 명예, 지고한 명예는 항상 역사적으로 불운한 것이었다』고.
예수 성탄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가난일 것이다. 하느님의 겸손, 하느님의 사랑일 것이다. 하느님이 인간의 가난 한 복판에 찾아오신 것이다. 하느님이 인간의 불운한 처지에 함께 하신 것이다. 하느님이 인간의 억울한 희생적 죽음을 함께 하신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황금율, 진복팔단을 하느님이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성탄은 기쁜 날일 수 있다.
가난하게 태어난 예수 때문에 이제 인간의 가난은 빈손이 아니다. 모든 이의 모든 것이신 하느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의 슬픔은 눈물이 아니다. 하느님의 위로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억울한 희생적 죽음은 더 이상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불의가 결코 희생된 억울한 죽음을 짓밟고 그 위에 설 수 없다. 생명이신 그분이 그 희생된 죽음 한 복판에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성탄은 가난한 자, 억울한 자, 희생된 모든 이들에게도 기쁨을 선포한다. 『재수없는 하루살이의 탄생이여 행복하여라.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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