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 말, 원고료 대신 노트북을 받았다. 노트북이 너무 오래 되어 바꿔주고 싶어서였다지만, 사실 난 노트북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1995년부터 8년을 써 오면서도 단 한 번도 고장이 나지 않았다. 단지, 메일을 전송해야한다든가, 자료 검색할 때마다 아들 방을 드나드는 게 조금 번거롭긴 했지만, 인터넷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받아들였다.
헌데, 마치 시앗을 본 아내처럼 새 노트북이 들어온 지 일 주일만에 문제가 발생했다. 멀쩡하던 FDD(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버)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었다. FDD만 갈면 되겠지 라고 쉽게 생각했는데, 오래된 기종이라 FDD가 있는지 모르겠으며, 구할 수 있어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싸니까, 차라리 컴퓨터를 분해해서 자료만 백업받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고개를 저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내 손과 머리가 되어 같이 사는 8년 동안, 노트북 자판의 흰 글씨는 지워져버렸고, 「F」와 「J」에 있는 블록 표시도 완전히 닳아 없어져 매끌매끌했다. 갑자기 내 분신처럼 생각되었다. 시간과 돈이 들더라도 고쳐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예전의 원고가 필요할 때마다 일일이 다시 치면서 비경제적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만큼 썼으면 본전 다 뽑은 거 아닐까.
노트북을 분해해서, 인간의 뇌에 해당하는 손바닥만한 하드 디스크를 꺼내는데는 몇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8년 동안의 기록들이 새 노트북에 이식된 것도 잠깐이었다. 새 노트북에서는 예전과 똑같은 파일을 불러들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메일 전송과 인터넷 검색도 가능했다. 구형 노트북 때문에 안타까워했던 내가 오히려 미련스럽다고 느껴졌다. 순식간의 감정변화였다.
문득, 복제 인간이 탄생되었다는 기사가 떠올랐다. 인간의 뇌도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처럼 자유롭게 이식할 수 있게 된다면, 맘에 드는 몸을 복제해서 뇌를 이식한 다음, 이제까지 사용하던 몸을 컴퓨터의 하드웨어 폐품처럼 아무렇지 않게 버릴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은 인간의 몸보다 늑대나 사자의 몸을 더 선호할지도 모를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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