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일을 당하여 놀라게 될 때, 본능적으로 『아이쿠 어머니!』 혹은 『아이쿠 하느님!』하고 외친다. 오래 수도생활을 하신 수녀님들이나 구교우들은 『예수, 마리아, 요셉!』하고 외친다.
아마도 막다른 곤경에 처해 있는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마지막 후원자를 부르는 것이리라. 그 후원자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존재일 것이다.
사람들이 태어나 제일 먼저 만나는 소중한 존재는 「엄마」다. 그래서 유아들은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여 운다.
아이가 자라 학교에 다니면서 선생님이라는 소중한 존재를 만난다. 「엄마」의 말보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더 성장하면 아이에게는 친구가 소중해진다. 그때가 되면 선생님 보다 친구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인다. 친구가 원하면 나쁜 일도 서슴치 않는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아이는 이성의 친구를 위하여 그동안 친하게 지냈던 동성의 친구들을 기꺼이 배신한다.
그 다음에는 배우자가 더 소중한 존재가 되고, 자녀를 낳으면 자녀가 그 누구보다도 소중해진다. 그처럼 인간은 삶에서 새로운 존재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 소중한 존재는 바뀐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인간이 만나는 소중한 존재는 누구일까?
수십 년 간 찰스 5세에게 충성을 바친 어느 신하의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병이 들어 죽어가는 신하를 찾아온 왕은 그간 충성을 다하여 섬긴 보답으로 그가 원하는 바를 들어줄 것을 약속하며,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다. 그 신하는 왕에게 청하였다. 『전하, 하루만 더 살게 해주십시오. 하루만』
그러자 왕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강력한 제왕 중 하나이지만 자네가 요청하는 것은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구나. 오직 하느님만이 삶의 선물을 하사하시고 유지하실 수 있다네』
그러자 신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다면 왕을 모시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하느님을 모시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어야 하는 건데 제가 어리석었군요』
그렇다. 우리가 죽어갈 때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소중한 존재는 하느님이시다. 아니, 사실은 인간이 출생하면서부터 가장 소중한 존재였을 것이다. 우리에게 생명을, 건강과 재주와 나의 모든 것,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을 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다만 마지막에 깨닫게 될 뿐이다.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느님이시기에 보이는 것과 만져지는 것에 가리워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시인 칼릴 지브란은 노래하였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그 뒤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위대함에/ 견주어 보면』
그렇다. 우리가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아주 작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소중한 분이심을 일깨워 주셨고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위대한 비밀을 인간에게 알려 주셨음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알 수 있는 것도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어느 신학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있게 바라보면 하느님의 위대한 인간 사랑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을 위해 기꺼이 당신의 외아들을 바치시는, 수난 받는, 사랑의 하느님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린 아직 그 빙산의 거대한 밑 부분을 바라보지 못한다. 자신의 무능 때문에, 죽음에 이르러 전능하신 하느님을 소중한 존재로 깨닫는 일은 위험하다. 하느님이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인 것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바리용 신부님은 말한다. 『하느님의 본질은 사랑이지 힘이 아니다. 하느님에게 믿음을 두지 않고 하느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믿는 만큼, 신앙 생활을 근본부터 그르치는 것은 없다. 그것만큼, 미신을 만들어내는 것은 없다』
그리고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강조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실 뿐이다. 내게 그분이 전능하시다고 말하려 하지 마라. 하느님의 전능함은 사랑의 전능함이다. 바로 사랑이 전능한 것이다. 사람들은 때로 하느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하느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할 수 있는 것만을 하실 수 있다. 그분은 사랑이실 뿐이기 때문이다』
죽음에 이르러서가 아니라 일찍이 자신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소중함을 깨달은 사람들이 많다. 성인 성녀들이 그렇다. 그 가운데 대표적 인물로 아빌라의 데레사 수녀님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나를 창조하셨으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속죄하셨으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부르셨으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기다리셨으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란 무릇 죽음에 이르러서가 아니라 이승의 삶에서부터 사랑이신 하느님의 소중함을 깨우치려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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