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아는 분의 모친이 돌아가셔서 장례 미사에 갔다. 미사가 끝나고 주례사제는 가족 중의 한 분에게 인사말씀을 하라고 하시면서 둘째 따님의 남편이 되는 고인의 사위에게 마이크를 권하셨다. 돌아가신 분은 따님만 셋을 낳으셨고 아들이 없으셨던 것이다. 따님 세분이 나란히 한 분의 사위와 서 있었는데 사제는 그 분이 고인의 아드님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면서도 사위에게 인사말씀을 하라고 하신 것이다. 고인의 세 따님들은 제쳐놓고 말이다. 사위 분이 약간 어색하신 듯하게 간단히 인사하신 후에, 다행히 맏 따님이 자발적으로(!) 인사말씀을 보충해서 잘 하셨다.
여성은 앞에 나서지 않아야 하고 공적인 자리에서 가족의 대표가 될 수 없다는 의식이 아직도 그 사제에게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우리사회가 여권 신장과 양성평등이 전보다는 많이 이루어졌고, 정부도 제도적으로 여성의 참여를 확대하는 방침을 실행하고 있으나, 사람들의 의식을 바꾼다는 것은 대단히 오래 걸린다.
율법과 제도에 얽매어 있어서 사람보다 율법이 더 중요시되던 유대사회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무시하시지 않으시면서 법이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므로 사람을 더 중요시 해야한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가르치셨지만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고 계속 율법에 너무 의존하여 노예의 상태를 못 벗어났던 것이다.
분명히 창세기에(1, 27) 보면 하느님의 모상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한다. 그러니 남자와 여자는 똑같이 하느님의 모상이다. 그런데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여성들은 그 동안 차별 받고 억압당하고 배제됨으로써 뒤편에, 주변에 머물러 살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여성이 남자보다 약한 부분은 단지 완력 면에서만 그렇다고 한다. 그 외에는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영적이든 어떤 면에서든 각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이지 여성이냐 남성이냐에 따른 것이 아니다.
요즘 서울대교구에서는 시노드가 진행중이며 평신도분과에서는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 노인, 여성, 가정분야를 다루고 있는데 여성분야에서 교구나 본당에서의 의사결정과정에 여성들의 참여를 보장하기 위해 여성할당제를 건의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토론하는 중에 여성들은 무슨 책임을 주거나 참여할 기회를 주어도 안 하려고 한다는 비평을 받는다.
너무도 오랜 세월동안 여성들은 침묵하고 뒤에서 조용히 있도록 요구되어 왔으며, 또한 많은 여성들은 사회활동이 별로 없이 가정살림에 전념해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참여할 수 없었던 분야의 책임을 맡거나 주로 남성들로 구성된 단체에 참여하기가 힘들지 않겠는가!
그래도 기회를 주어서 조금 서툴더라도 경험을 쌓을 때까지 기다려 주어야하지 않을까? 어떤 분들은 여성할당제를 하는 것은 역차별하는 것 아니냐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여성들이 관습이든 규칙에 의해서든 의사결정과정에서 배제되어 왔으므로 그러한 차별이 사라질 때까지만 할당제를 실시하자는 것이다. 남녀에게 진정 동등한 기회가 모든 면에서 주어져 왔다면 여성할당제를 정치에서나 우리 한국교회 안에서나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미국의 가톨릭 교회를 보면 여성들이 교구의 행정과 전문직에 50%를 담당하고 있으며, 그 중에 교구 총대리직은 128개 교구중 30개 교구에서 여성이며, 국장직을 맡은 경우가 25%라고 한다. 이들 여성중에 평신도 여성이 수도자보다 더 많은 60%이고 여성수도자가 40%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성직자수의 부족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평신도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이 50%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교회는 교구의 국장직은 의례 성직자가 맡고 있는 현실이다.
미국에서는 여성이 성체분배를 하는 것을 당연하게 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이 성체분배하는 것을 한국인의 정서상 맞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우리의 정서를 소중히 여기고 신중하게 고려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변화를 거부하는 변명은 아닐까?
주로 여성들이 잔치나 제사 때 음식을 제공하는데 성찬에서는 남성만이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얼까? 그리스도의 여성에 대한 존중과 동등한 대우는 그 시대의 유대인의 정서와 관습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대낮에 우물가에서 여인과, 더구나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던 사마리아 여인과의 긴 신학적인 대화(요한 4, 1∼29)는 그 시대의 정서와 관습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었던가! 문화라도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에 맞지 않을 때는 과감히 뛰어넘어야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영자 수녀는 현재 주교회의 여성소위원회 운영위원장, 「가톨릭 여성의 전화」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