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또 한 번의 부활절을 맞는다. 예수님은 오늘 익숙한, 그러면서도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진정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는가. 우리를 위해 오시는 주님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사순절은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부활을 준비하는 시기다. 속죄와 보속의 시기이며, 기도하고 사랑하고 자선을 실천하는 시기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 특별한 시기에 또 다른 기독교인이 일으킨 전쟁을 지켜보며 참담한 심정을 달래고 울분을 삼켜야 했다. 미국이 「이라크인의 자유를 위해서」라는 구실 아래 벌인 이 파렴치한 전쟁에서 수많은 이라크 국민이, 힘없는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 그리고 병사들이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보아야 했다.
미국이 내세운 논리는 예방전쟁이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한 사람이며 전 세계를 상대로 가공할 무기로 무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위협이 너무나 크고 위협의 결과가 미칠 영향이 가공스럽기 때문에 군사력을 사용해서라도 후세인을 제거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이라크 침공에 내세운 명분의 이면에는 석유와 패권에 대한 탐욕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더 큰 문제는 부시 대통령이 이러한 속셈을 신앙의 허울을 씌워 호도하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후세인은 악이며, 악을 축출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대신하여 심판하는 자의 모습이다. 그는 미국이 자유라는 하느님의 선물을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가져다 주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 시대의 예언자가 아니고 무엇인가. 교만이 하늘을 찌른다. 그의 신앙은 미국 남부 기독교 우파의 근본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계시를 받은 것일까. 아니면 환각에 빠진 것일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전쟁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소리 높여 비난하고 있다. 심지어는 『하느님이 사악한 자들의 손에 역사를 방치한 듯이 보여도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침묵은 역사를 방기하는 것 같은 부재가 아닙니다. 때로는 침묵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정적 개입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까지 말하였다.
교황은 단지 제스처를 보이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로마 교황청은 지난 2000년 대희년을 맞으면서 「기억과 화해: 교회와 과거의 잘못」이라는 문서를 발표하고 십자군 원정 등 교회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들에 대해 사죄한 바 있다. 교황은 그해 사순 첫 주일 「용서의 날」에 봉헌된 미사에서 『자만이나 증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지배욕, 다른 종교인과 사회적 약자 집단들에 대한 적대감에서 나온 말과 태도들에 대해 회개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구하였었다. 교황은 그 연장선상에서 교회가 세속 권력의 잘못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 된다는 의지를 실천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신앙인들이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해 주님께 용서를 청하고 있을 때, 다른 한쪽에서는 아침에 성경을 읽고 저녁에 전쟁의 칼을 치켜든 것이다. 그 옛날 십자군 전쟁에서, 남아메리카 신대륙에서 서양의 기독교도들이 저지른 만행을 지금 미국의 이라크침공에서 다시 보는 느낌이다. 부시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느님」과 다른 분인가.
한국 정부는 부시의 전쟁을 지지하고, 더 나아가 군대까지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정부나, 파병을 지지한 국회의원들이나 모두 국익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들 중에는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그리스도인이 적지 않다. 대통령은 하느님을 「희미하게 믿는」 냉담자라니까 그렇다 치고, 스스로 교인임을 밝히는 정부 관리들과 정치인들에게 묻고 싶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 전쟁을 어떻게 보실 것으로 생각하는가. 주님이신 그리스도 앞에 전쟁을 지지하고 파병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세상을 하느님의 잣대로 보아야 한다. 적어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교회 안에서 그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인터넷 카페의 동호회 모임이 아니다. 우리마저 세상 일을 현실의 잣대로만 본다면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뭐라고 고백할 것인가. 우리의 삶에서 이런 일에 신앙적 판단과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의미가 없다.
예수님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듯이 예수님의 부활도 단지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부활의 의미를 올바르게 깨닫고 그에 따라 실천적 삶을 살 때 예수님은 바로 우리 안에서 다시 부활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2000년 동안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영구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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