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을 맞이해서 여동생 셋이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 동생 하나가 곧 외지로 떠날 예정이어서 함께 하는 시간을 좀 갖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누가 내게 어떤 극단의 「로미오와 줄리엣」 연극표를 주었다. 막내동생이 영문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함께 가고 싶었지만, 연극을 보는 시간과 오가는 시간 합쳐 모두 서너시간 동안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두 살 짜리 아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래도 내가 「울더라도 할 수 없다, 엄마 떨어지는 연습도 해야 한다」며 강력히 주장해서 어머니와 다른 동생들이 아기를 보는 동안 막내동생과 나는 연극을 보러 가기로 했다.
연극을 보러 가는 날 동생은 들떠 있었다. 아이 둘을 키우는 정신에 연극 관람을 하는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아기를 재워놓고 샤워를 하고 살금살금 헤어드라이어를 꺼내 거실 한구석에 돌아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머리를 말리는 동생의 뒷모습을 보다가 나는 문득 눈물이 났다.
일류대학에서 공부 잘하는 수재로 날렸던 동생…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여 아이들을 키우면서 연극은 커녕 책볼 틈도 거의 없지만 늘 공부를 더 하고 싶어하는 동생. 무명극단이 하는 공짜 연극이나마 보러 가는 것을 너무나 기뻐하고 들떠 있는 모습이 왠지 가슴 아팠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항상 동생의 예쁘고 상냥하게 웃는 앞 모습만 보면서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나는 머리 말리는 동생의 가녀린 뒷모습을 보고 느꼈다.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아쉬움, 가슴 속에 여전히 담겨있는 소망, 조금은 피곤하고 지친 듯한 뒷모습에서 어떤 애잔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가끔 누군가의 뒷모습이 앞모습보다 더 정직하게 마음을 전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얼굴은 웃고 있어도 짝사랑하는 연인을 오랫동안 기다리다 돌아서는 사람의 뒷모습은 어쩐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처지고 슬퍼 보이고, 짐짓 별 것 아니라는 듯 숨기려해도 지금 막 기쁜 소식을 들은 사람의 뒷모습은 어딘지 힘줄도 불끈불끈, 생동감 있고 기뻐보인다.
서강대학교 안에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이냐시오 성당 앞에는 실물 크기의 예수성심상이 서 있다.
그냥 어디서나 흔히 보는 예수님상이고, 성당 들어가기 전 잠깐 인사드리는 것 외에 별로 눈여겨보는 일도 없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예수성심상 뒤에 있는 국제관에 미국 친구가 묵게 되어 그 친구 방까지 올라간 적이 있다. 친구 방에서 창 밖을 무심히 내려다 보다가 나는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창 밑으로 혼자 서 계시는 예수님의 뒷모습이 보였고, 조금 구부정하게 서서 두 팔을 벌리고 계시는 그 뒷모습이 이상하게 너무나 낯설고 서글프게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을 「따른다」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따른다」는 것은 그 사람을 믿고 그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그가 가는 방향으로 발을 내딛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뒷모습보다는 앞모습에 훨씬 더 익숙하다.
눈을 마주하고 이건 왜 이렇고 저건 왜 저러냐고 빨리 설명해 달라고 이리 묻고 저리 따진다.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은 항상 일일이 답해 주시고 설명하시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런 예수님의 뒷모습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다음 질문을 준비한다.
말로는 「당신을 따른다」면서도 자꾸 앞을 가로막아 서는 우리를 보시는 예수님의 뒷모습이 서글퍼 보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지 모른다.
한 학기를 마무리하고, 이제 겨우 한숨을 돌린다.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예수님 뒷모습을 보며, 그분을 좀 더 잘 믿고 따르기 위해 이젠 그분 뒤에 서는 연습이 필요할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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