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전인 5월 18일(주일)에 우리 수녀회의 창립자이신 마리아 데 마티아스 수녀님께서 로마에서 시성되셨다.
1834년에 우리수도회를 이탈리아에서 창설하셨고 지금은 27개국에서 성혈흠숭수도자들이 그분의 뜻을 담아 예수님의 인류구원의 사랑을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마리아 데 마티아스께서 시복되신 것은 1950년이었으니 53년만에 시성되신 것이다.
교회의 공식적인 선포가 있어야만 성인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닌 것이다. 그 분의 깊은 믿음과 자신을 모두 내놓은 삶은 예수께 대한 사랑으로 불탔고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했음을 그 분의 생애와 2000통이 넘는 서한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처럼 그 시대 이탈리아에서도 여성은 거의 교육을 받을 수가 없었던 때였는데 마리아 데 마티아스께서는 15세 정도 되었을 때 여성들도 배워야한다는 의식이 있어서 동네 소녀들을 자신의 집에 모아놓고 신앙과 읽기 쓰기 등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으니 여성운동의 선구자라 아니 할 수 없지 않은가!
내가 여성문제에 대한 의식이 없었던 과거에는 깨닫지 못했었는데 그 분의 생애가 진정 여성차별을 없애고 여성의 권익을 위한 삶이었음을 몇 년 전부터 깨닫게 되어 우리회의 창설자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이 더욱 커졌다고 하겠다.
마리아 데 마티아스께서 29세 되시던 해에 아쿠토라는 마을에서 학교를 시작하려하는데 교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에 응답하였고, 그 교구 주교님께서 그 뜻을 받아주시어 발레콜사에 집을 떠나 그 곳에 가게 되었다. 물론 단순히 학교만이 아니라 수녀회의 창설을 목적으로 한다는 의지를 주교님께 말씀드렸으며, 학교를 시작한 1834년 3월 4일이 바로 수녀회의 창립일이 되었다.
그 시대에 교회는 수녀원에 저녁 6시가 넘으면 남자들은 일체 출입할 수 없게 하라는 규칙을 지키도록 하였다. 마리아 수녀님께서는 날마다 아침 일찍부터 하루종일 산에 가 있는 양치기 소년들이 신앙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다는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그들을 모아서 수녀원에서 그들이 올 수 있는 저녁시간에 신앙교육을 하였다.
교회에서 지시한 규칙이었으나 규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융통성 있게 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의 규칙에 의하면 위법이지만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셨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교우들이 너무 규칙에 지나치게 얽매어 자신이나 타인에 대한 사랑실천 보다 규칙을 더 중시하는 것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때가 있다.
지금도 교회에서 여성은 강론을 못하게 하고 있는데 마리아 수녀님이 사셨던 당시에도 여성이 성당에서 신자들을 가르쳐서는 안된다는 규칙이 있었다.
그 당시 이탈리아는 전쟁을 겪은 후에 교회가 침체되고 사목자들이 제대로 사목을 안하고 있었으므로 많은 신자들은 신앙교육을 받지 못한 채 방임된 상태에 있었다.
십자가에서 당신의 마지막 피 한 방울 마저 다 흘리시며 인간의 구원을 위한 사랑으로 돌아가신 예수님께 대한 애끓는 사랑으로 불타셨던 마리아 수녀님께서는, 사람들을 성당에 모아 열성을 다해 예수님의 사랑을 말씀해 주셨다.
그 분의 말씀에 너무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고해성사를 보기를 원했고, 그 숫자가 아주 많아서 사제들이 불평을 할 지경이었으며 마리아 수녀님을 원망했다. 그러나 사제들은 그 수녀님의 예수님 사랑에 대한 열렬한 말씀에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학교와 함께 수녀회의 회원 수는 점점 늘어갔고, 다른 교구에서도 마리아 수녀님에게 학교를 위해 수녀들을 보내달라는 주교님들의 요청을 받게 되어, 소속 교구 주교님께 허락 해주시기를 청하였으나 주교님께서는 다른 교구에는 가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셨다. 다른 주교님들의 요청은 계속되었고 마리아는 열심히 기도와 식별을 한 후에 하느님의 뜻은 그 교구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얻고 수녀들을 파견하였다.
그 분은 순명을 대단히 강조하셨고 실천하셨으므로 주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셨고 열심히 기도로써식별을 하신 후에 내린 결정이었다. 몇 년이 지나서야 주교님은 마리아 수녀님의 결정을 인정하게 되셨다.
이제 교회가 그 분의 성덕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선포했으므로, 그 분의 깊은 믿음, 사랑, 용기와 진취적인 사도적 삶은 우리 수도회원만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 여성들의 귀감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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