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차례 정부 교체를 거치면서 체험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새로운 현실과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학자들은 최근 10년을 권위주의체제에서 민주적인 체제로 넘어가는 이행기라고 한다. 이 이행과정에서 결코 간과해선 안될 것이 있다. 바로 현대사에 저질러진 불의를 청산하는 일이다.
그것은 21세기니 세계화니 2만불시대니 하는 희망의 말로는 가릴 수 없는 고통이 이 땅에 너무 많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고통을 없애기 위해 함께 하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가장 큰 몫이 아닐까 한다.
근래 우리의 의식을 비집고 들어선 「민간인 학살문제」가 대표적인 사례다. 국가권력에 의해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도 오히려 누명을 쓰고 사는 것보다 비참한 경우가 있을까. 우리 역사는 이와 관련해 다양한 체험을 갖고 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군이 만주지역의 조선인들을 독립군과 내통한다며 집단적으로 학살하고 초토화했다.
해방 후엔 대한민국 정부가 동족을 향해 말 그대로 남녀노소를 불문한 일제의 만행을 그대로 반복했다. 제주도, 경산코발트광산, 산청, 고양, 전주교도소, 대전교도소, 함평, 거창 등이 유명해진 데에는 학살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유족단체들이 작성한 학살지도를 보면 우리 산하는 금수강산이 아니라 학살당한 원혼이 들끓는 피의 강산이라 불러야 할 참이다.
이러한 체험은 국제적이기까지 하다. 몇해 전 미군의 노근리학살이 대서특필되었던 것과 동시에 국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학살도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밝힌 한 일간신문에 대한 참전군인들의 거센 항의도 기억에 생생하다. 학살에 관해서라면 우리 민족은 피해자일뿐 아니라 가해자이기도 한 것이다. 학살로 인한 고통은 가해자이든 피해자이든 양심에 세워진 무덤의 관뚜껑을 열고 나오기 마련이다. 「베트남진실위원회」를 통해 양 국민간의 화해가 시도되고 있다는 점은 무척 다행스럽다.
최근 한국전쟁 전후 학살과 관련해 전국의 유족회들이 함께 힘을 모으고 있다. 이들은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통합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장기간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유족회가 제시한 법안은 기본적으로 진상조사,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생활 및 의료지원, 명예회복을 골자로 삼고 있다. 그 내용은 제주 4.3법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매우 타협적인 법안이었다.
한국전쟁 종전 50주년이 되는 올해는 전국에 걸쳐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불의를 청산하고 이 땅에서 다시는 학살뿐 아니라 전쟁도 일어나지 않게 할 좋은 기회인데, 안타깝게도 이 미약한 수준의 법안마저도 국회 상임위원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국제인권법은 과거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범죄를 처벌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발전했음을 살필 수 있다. 사실 학살은 직접 학살을 기획하고 가담한 자들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만 사태를 본다면 가해자들, 특히 핵심주모자들이 죽고 없는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추궁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필자는 학살은 학살자 개인의 책임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 모든 성원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첫번째 책임은 직접 범죄자의 민형사 책임을 의미한다. 즉 학살자는 엄격한 의미에서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두번째 책임은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 자들의 책임이다. 이 말은 묘하게 책임을 희석시키려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두번째 부류의 책임은 다음과 같다. 학살이 저질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죄(책임), 저지하려고 노력했을지라도 결과적으로 저지하지 못한 죄(책임), 또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B. Brecht)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말한 동료는 죽었는데 운좋게 저만 살아남은 죄(책임) 등이다. 이러한 책임을 야스퍼스는 각각 도덕적 책임, 정치적 책임, 형이상학적 책임이라고 했다. 나치제국의 죄상을 지켜본 야스퍼스는 이렇게 다양한 책임을 강조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지금 추궁해야 할 책임도 50년이 지나도록 불의를 방치하고 희생자들과 아픔을 함께 하지 않는 데 대한 공동체구성원 전체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범죄자들에 의해서 미화된 역사를 반복하고 권력자들이 지어낸 사회적 악평과 침묵에 동조함으로써 우리의 책임과 죄를 날로 키우고 있는 형편이다.
학살의 고통을 여전히 짐지고 있는 이들과 연대하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최소한 법적 사회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2만불시대 구호보다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사회적 안전망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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