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여섯시는 되었을까.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한 아이는 업고, 한 아이는 손을 잡고, 또 한 아이는 한 걸음 앞세우고 아파트 정문을 들어선다. 아무런 감정도 어떤 희망도 엿보이지 않는 그녀의 눈,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이들은 방금 전까지 놀이터에서 친구들한테 배운 노래들을 흥얼거린다.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아파트 외벽을 울린다. (…) 14층과 15층 사이에서 그녀는 아이들을 불러 세운다.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자고 칭얼대던 아이들이 반색을 한다. 아이 엄마의 등도 그 등에 업힌 아이의 가슴도 이미 온통 땀으로 덮여있다. 잠시 거친 숨을 고른 후 엄마가 천천히 말하기 시작한다.
그만! 이 잔인한 상상을 멈추자. 이렇게 잔혹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신문기사를 일찍이 본 적이 있는가? 생활고에 시달린 삼십대 중반의 한 엄마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아이들을 먼저 14층 아파트에서 던지고 자신 또한 그렇게 몸을 던진 이 사건은 전국을 충격 속에 몰아넣었다. 그 충격 속에서 사람들은 말하기 시작했다.
한편에서는 그녀를 일컬어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전근대적인 또는 미성숙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비난하고, 또 한편에서는 그토록 성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했던 사람들마저 지켜주지 못하고 죽음으로 내모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더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일견 이 두 주장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일단 위의 두 말을 그대로 긍정해 보자. 그녀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다. 아무리 사는 게 힘들어도 그렇지 어떻게 아이들까지 죽일 생각을 했을까? 이런 사건이 전에도 여러 번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개연성 때문에라도 이것만은 도저히 양보해서는 안 된다. 이 사건은 살인이지 언론들의 표현대로 「동반 자살」이 아니다. 아이들은 마지막까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이것은 어떤 말로도 정당화시킬 수 없는 죄악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건을 전적으로 그 젊은 엄마 개인의 미성숙과 비윤리성으로 돌리는 것 역시 동의할 수 없다. 이런 관점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은폐하는 것에 불과하다.
가구 공장에 다니던 남편이 갑작스럽게 실직했을 때 그들은 어떤 사회안전망의 혜택을 받았나? 그리하여 삶의 나락까지 추락해 국가의 도움을 요청하러 관공서에 찾아갔을 때 국가는 과연 어떤 도움을 준 적이 있는가?
냉정한 국가는 오로지 서류 속의 규정에 의지해서 그들의 요청을 거절했다. 사회가 그들에게 해준 것이라고는 그들의 미래와 생명을 담보로 신용카드라는 독약을 마시게 했을 뿐이다.
이 사건에는 분명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생각하는 완고한 가족주의적 정서가 깔려 있다. 이때 이 잘못된 가족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족 그 자체를 지워버리는 폭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로부터 그 어떤 도움도 얻을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가족」 이외에 무엇이 있을까?
자신의 죽음 이후에 남겨질 그 아이들을 이 국가와 사회가 어떤 차별이나 선입견 없이 잘 보호하고 양육할 수 있다고 어느 누가 기대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이렇게 왜곡된 한국식 가족주의는 결코 유교적 유산만이 아니다. 그것은 아주 생생한 사회적 현실에서 길어 올려진 것이다.
다른 사회와 비교하든 아니면 그 자체로 분석하든, 우리 사회가 고도의 위험 사회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 같다. 가장의 갑작스런 실직, 엄청난 비용을 요구하는 중병, 감당할 수 없는 부채 등은 언제라도 우리를 이 사회의 가장 막다른 골목까지 이끌 수 있다. 그 과정에 법과 제도라는 이름의 안전장치는 여간해서 보이지 않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 고도의 위험 사회에서 우리 자신과 가족의 안전은 얼마나 보장될 수 있을까?
전통적으로 우리 교회는 애덕과 자선을 가장 중요한 신앙 덕목으로 칭송해 왔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애덕과 자선을 그냥 한 개인의 신앙 실천으로만 맡겨두지 말고 사회적 제도화로 이끄는 데 교회가 나서는 것은 어떨까?
한 개인이나 가족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이런 위험 요인들을 구조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정책 대안들에 대해서도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사건은 우리에게 한편으로는 고통과 상처를, 한편으로는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진심으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빌며, 유족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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