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5시 반쯤 교회내 라디오 방송에서는 「아름다운 나눔」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한다. 재정적으로 사정이 안 좋은 가정을 소개하고 도움을 청하는 프로인데, 꼭 들으려 계획하는 것은 아닌데 퇴근길에 자주 듣게 된다.
얼마 전에는 어떤 가난한 어머니에 대한 방송을 했다. 아이가 모계유전으로 불치의 병에 걸리자 아버지는 이혼을 요구했고, 양육비도 주지 않았다. 몸이 허약한 어머니는 아이를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날이 갈수록 이웃이나 친척의 도움도 사라져 가면서 살 길이 막막해지자 절망한 어머니는 마침내 아이를 데리고 죽을 결심을 했다.
마지막으로 아이와 함께 아이가 보고 싶어하는 바다에 갔다. 어둑어둑한 바다에 오징어배가 환하게 불을 켠 채로 모여 있었다. 아이가 말했다. 『엄마 저 불빛 참 예쁘지? 너무 예뻐』
인터뷰에서 그 어머니는 말했다. 『배를 보고 예쁘다고 감탄하는 아이의 그 마음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 살 수 있는 권리를 내가 뺏을 수가 없어서 죽기를 포기했습니다』
콩알 몇 개를 소중하게 품고 다니는 어머니가 있었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고 설상가상으로 가해자로 몰리자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그대로 길거리로 쫓겨났다. 초등학교 3학년과 1학년인 형제를 데리고 너무나도 힘겨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남의 집 헛간에 세들어 살며 일을 찾았고, 자연히 살림은 초등학교 3학년 형이 맡았다. 그런 생활이 반 년. 그러나 아무런 직장경험이 없는 어머니는 죽도록 일해도 살림은 비참할 정도로 어려웠다.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세상이 원망스러워서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죽기로 했다. 아니,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일을 나가면서 어머니는 오늘은 집에 오는 길에 약을 사와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래도 죽는 날까지 아이들을 굶길 수가 없어서 냄비에 콩을 넣어 두고 집을 나서면서 맏이에게 메모를 써 놓았다.
『형일아, 냄비에 있는 콩을 조려서 오늘 저녁 반찬으로 하거라. 콩이 물러지면 간장을 넣어 간을 맞추면 된다. 엄마가』
생각대로 그 날 어머니는 남몰래 수면제를 사들고 돌아왔다. 두 아이는 나란히 잠들어 있었는데 맏이의 머리맡에 「엄마에게!」라고 쓰인 편지가 놓여 있었다.
『엄마, 엄마가 말한대로 열심히 콩을 삶았어요. 그리고 콩이 물렁해졌을 때 간장을 부었는데 형민이가 「형! 짜서 못 먹겠어」하며 안 먹었어요. 그리고 반찬도 없이 거의 맨밥만 먹고 그냥 잠들어 버렸어요. 엄마, 내일 나가시기 전에 저 깨워서 콩 잘 삶는 법 꼭 가르쳐 주세요』
어머니는 가슴이 뭉클했다. 『아, 저 어린것이 이토록 열심히 살려고 하고 있구나』
콩 하나라도 열심히, 동생 입맛에 맞도록 삶아 보려는 아들의 의지가 너무나 기특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어머니는 사왔던 약봉지를 치웠다. 아들의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게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살아보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콩알 몇 개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힘들 때마다 꺼내 본다고 했다. 『콩알만큼의 희망이라도 있으면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결국 가난에 절망하고 세상에 지친 두 어머니는 아이들에 의해 삶에 대한 의지를 새로 깨달았다.
이 험한 세상 살아가며 이리 치대고 저리 부대끼며 문득 「아, 참 싫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자괴감에 빠질 때가 있다. 내 한 몸둥아리 없어지면 그만일 것을, 그러면 모든 것을 다 잊고 평화롭게 잠들 수 있을 것을 하는 강렬한 욕망에 휩싸이기도 한다. 세상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각박해짐에 따라 이런 욕망을 더욱 강해지는지, 작년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자살한 사람의 수는 1만3050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 중에서도 두 개의 죽음. 살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아이들 둘을 밀치고 자신도 세 살짜리 막내를 안고 아파트에서 떨어져 동반 자살한 어머니의 죽음과, 이 세상의 모든 권력과 부를 다 손에 넣고 우리가 부러워하는 행복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것처럼 보이던 정몽헌 회장의 자살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나뭇가지가 흔들려야 바람이 있는 줄 알고 절벽에서 떨어져야 인생이 절벽인 줄을 안다』 오늘 아침 라디오에서 정회장의 죽음을 두고 누군가 한 말이다. 무엇이든 뒤늦게 깨닫는 인간의 한계를 두고 한 말 같다. 석양에 예쁜 오징어배가 있는 아름다운 세상,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이 세상을 그들은 왜 버려야 했을까.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 보면, 아마 그들은 콩알만큼의 희망도 이 세상에서 발견하지 못했나 보다. 우리가 그들에게 그만큼의 희망도 주지 못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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