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책상정리를 하다가 책꽂이 뒤에 박혀 있는 작은 노트를 발견했다. 영작시간에 영어로 일기를 쓰게 하는데, 지난 학기말에 걷어서 읽다가 수미 것을 잃어버려 결국은 돌려주지 못했었다. 방 치우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나는 잠깐 의자에 앉아 수미의 일기장을 다시 읽어보았다.
2003년 6월 3일의 일기를 대충 우리말로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남자친구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 그러나 우리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둘 다 너무 가난하다는 것이다. 내 친구들은 영화도 자주 가지만 우리는 돈이 없어 못 갈 때가 많다. 남자친구의 집이 너무 가난하고 식구가 많아서 그가 아르바이트해서 버는 돈까지도 어머니를 갖다 드려야 한다. 어디선가 「가난이 앞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옆문으로 빠진다」 라는 말을 보았다. 가난이 싫어서 어떤 때는 그와 헤어질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리고 마지막에 수미는 괄호 속에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는 질문을 하고 있었다.
수미의 질문 밑에 나는 다음과 같은 답을 써놓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 있는가이지, 무엇을 먹고 어디를 가는가는 중요하지 않단다. 오직 돈 때문에 지금 남자친구와 헤어지면 먼 훗날 후회하게 될 거야.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니까』
마치 영원한 진리라는 듯, 단어 하나 하나를 굵고 힘있는 필체로 쓰고 있었다. 돌이켜보건대 그것을 쓸 때만 해도 난 선생으로서 내가 주는 충고가 수미의 삶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데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 다시 읽어보니 왠지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리고 내 안의 작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남의 인생이라고 함부로 말하고 있군. 어떻게 돈 없이도 사랑만 있으면 행복하리라고 그렇게 단언하는가? 수미는 네게 모든 것을 정직하게 다 털어놓았는데, 너도 지금 수미를 정직하게 대하고 있는가?』 자신있게 「그렇다」라고 답할 수 없었다. 그저 선생의 체면상 교과서적인 답을 써놓았을 뿐, 수미의 딜렘마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답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사랑이냐, 돈이냐…무슨 신파극 제목 같지만, 따지고 보면 사랑과 돈은 영원 불멸의 인생 주제이다. 선생으로서, 아니 인생 선배로서 수미에게 어떤 대답을 해 줄 수 있을까. 수미에게 자신 있게 말했듯이, 나는 정말 돈 없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가?
나는 사는데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수입이 있고, 그래서 돈에 관해 초연하다. 아니, 내가 돈에 대해 초연하다고 생각하기를 즐긴다. 그렇다고 무소유가 미덕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어차피 한 세상 살다가는 건데 이왕이면 편하게 많은 것을 누리며 살다가고 싶다. 나는 절대로 햇살 한 줄기에 만족하는 디오게네스가 될 수 없고, 또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다. 돈 있는 사람들은 죄를 지어도 감옥에 가지 않고, 돈이 있어야 병도 고치고, 돈이 있어야 공부도 하고, 미국 속담에 「빈자루는 똑바로 서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돈이 있어야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자존심 내세우며 살 수 있다.
어제 오랜만에 찾아온 졸업생 기호는 최근에 부인 직장 때문에 강남으로 이사갔다고 했다. 며칠 전에 부인과 아이를 데리고 쇼핑을 나갔다가 구경 삼아 골프샵에 들렀다. 워낙 비싼 가격이라 살 의도는 없지만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는데, 일곱 살 난 아들아이가 골프채 하나를 들고 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랬더니 주인이 다짜고짜로 『이게 얼마나 비싼 것인데 함부로 갖고 노느냐』고 야단을 치더라는 것이다.
그때 명품 옷을 입고, 한눈에 봐도 돈이 좀 있어 보이는 부부가 기호의 아들과 같은 또래의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 아이가 골프채를 갖고 놀자 주인이 다가가더니, 『녀석, 몇 살이지? 잡는 폼이 그럴싸한데. 크면 박세리 되겠다』하더라는 것이다.
자신이 돈이 없어 설움 받는 것은 몰라도 아들이 「못난 애비」 때문에 차별대우를 받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다시 수미를 생각한다. 기호의 경험처럼 누구나 마치 머리에 더듬이가 달린 듯, 돈이 있느냐 없느냐를 즉각 감지하고 그에 따라 상대방에 대한 태도를 정하는 이 세상에서 앞문으로 들어오는 가난에 밀려 사랑이 옆문으로 새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결국 나는 수미의 일기장을 돌려주기 전에 질문을 하나 덧붙였다. 『한번 가정해보자. 아주 돈이 많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 돈은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 즉 돈없는 사랑, 사랑없는 돈 중에 어느 쪽을 택하겠니?』
물론 돈과 사랑, 둘 다 있으면 좋겠지만 내 경험으로 보아 인생은 「이것 아니면 저것」 선택일 뿐, 결코 「둘 다」가 아니다. 그리고 내가 수미라면 나는 그래도 사랑없는 돈보다는 돈없는 사랑쪽을 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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