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 이라크 전투병 파병 요청과 관련한 우리 정부의 공식 입장이 곧 표명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주미 대사와 경제 부총리를 비롯한 정부 내 핵심 관료들이 파병하는 것이 우리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발언을 했고, 이라크 현지 조사단이 귀국해서 한 말들을 들어보면 정부의 입장이 이미 파병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인상마저 풍긴다.
여기에 국회에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고 있는 정당이나 일부 언론들의 태도도 파병에 동조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는 국민 여론은 이와는 사뭇 다른 것 같다. 특히 국민 10명 중 6명이 파병에 반대한다는 최근의 여론 조사 결과는 정부를 비롯한 파병지지 세력에 상당한 부담을 줄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월의 비전투병 파병 때도 우리는 이미 극심한 여론의 분열 상태를 경험한 바 있다. 비전투병 파병 때도 그러했는데 전투병 파병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전투병 파병 이슈에서도 정부는 지난번과 똑같이 「명분론」과 「국익론」의 이분법적 취사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곧 미국이 일으킨 전쟁의 윤리적 부당성, 그리고 이에 논리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이라크 전쟁 지원이 분명 도덕적 명분에서는 크게 취약한 것이 사실이지만 자국 이기주의를 지상 과제로 삼는 냉엄한 국제관계의 현실에서 명분만을 내세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이분법은 궁극적으로는 국익론으로의 일원화를 강제하기 위한 「위장된 이분법」일 따름이다.
새삼스런 이야기지만, 미국은 이라크 전쟁 전에 후세인 정권을 9.11 테러의 주범이라고 지목된 알 카에다와 연계시켰고, 이어서 대량살상무기를 문제시 하면서 동시에 이라크 국민을 후세인 독재 아래 해방시켜서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게 하겠다는 명분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런 미국의 주장 가운데 그 어느 것도 확인된 바가 없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거짓이나 과장이었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곧 후세인과 알 카에다 세력은 서로 우군 관계라기보다는 적대적 세력이었고, 이라크가 그 어떤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최근 미국 정부도 공식적으로 확인한 바 있다.
지금 미국은 늘어나는 이라크 점령 비용과 인명 피해, 그리고 다시 한번 이라크 전쟁의 명분을 제고하기 위해서 국제사회에 손을 벌리고 있다. 이른바 동맹국이라는 한국과 일본 등에게 전투병과 점령 비용을 보조하라고 채근하고, 전쟁 당시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유엔에 이라크 결의안을 제출하고 화해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미국의 요청을 수락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그야말로 막연한 「국익론」에 기대어 다시 한번 이 부당한 전쟁에 동조해야 할 것인가? 이미 미국의 요청을 받은 다수의 동맹국들도 이에 난색을 표하고 있으며, 미국이 제출한 유엔 결의안에 대해서도 회원국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우리는 복음의 시각에서 「공동선」의 관점을 회복해야 한다. 이런 사회의 흐름에 대해 종교계를 중심으로 인류보편의 「공동선」의 관점을 회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게 일고 있다.
지난 9월 19일 청와대를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종교계 원로들이 이 자리에서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라크 파병 문제에 대해 유엔 평화유지군 속에 이라크 재건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비전투병으로 보내면 좋겠다는 제안을 한 것도 이런 보편적 가치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따라서 정부는 유엔이 이라크에서 실질적으로 미국과 영국을 대신해서 일할 수 있도록 가능한 국제적 조력을 다해야 한다. 곧 현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상정되어 있는 결의안처럼 미국이 실질적으로는 자신의 권리를 갖고 있으면서 유엔의 외피만을 빌리려 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분명한 반대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 그리하여 유엔이 실질적으로 이라크 문제의 중심에 서고, 그 아래 평화유지군이 창설된다면 거기에 비전투병을 보내 이라크 재건을 도와야 한다.
제발 이번만은 「대한민국의 이익」과 「미국의 이익」을 일치시키지 말고, 지금 당장 전쟁의 참화 아래 놓여져 고통을 겪고 있는 이라크 국민의 관점에서 이번 사태를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 과연 미국을 돕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전쟁으로 인해 고통과 실의에 빠진 이라크 국민을 돕기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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