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대학신문에서 인터뷰를 한다고 왔다. 여러 가지 다소 평이로운 질문-영어를 어떻게 공부하는가, 유학생활은 어떤가, 요즈음 스승제자 관계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끝에 기자가 문득 물었다. 『선생님은 언제가 제일 행복하세요? 아니, 진정 행복하다고 생각하세요?』
금방 대답할 말이 궁했다. 새삼 생각해 보니 『내가 언제 제일 행복한가?』 또는 『나는 진정 행복한가?』라는 자문을 해 본적도 없는 듯 하다. 회의시간이 되어 『글세…』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인터뷰를 끝내렸더니 기자는 내 대답을 꼭 듣고 싶다고, 나중에 전화를 하겠다고 했다.
내가 언제 행복한가. 『장미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새끼고양이 수염, 반짝이는 구리 차주전자, 따뜻한 털장갑, 선물꾸러미, 흰색 새끼말, 아작아작한 애플파이, 도어벨, 달을 이고 날아가는 기러기떼, 푸른색 새틴 벨트 달린 하얀색 드레스를 입은 소녀들, 내 코 끝과 속눈썹에 내려앉는 눈송이들…』
이것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주인공 마리아가 부르는 노래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들」의 가사이다. 가사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개에 물렸을 때, 벌에 쏘였을 때, 내 마음이 슬퍼질 때 나는 이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들을 기억합니다. 그러면 기분이 훨씬 행복해지지요』
살아가면서 기분이 나빠지고 우울해질 때, 나는 무엇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질까 생각해본다. 세 살짜리 조카와 함께 장난감 갖고 노는 것, 휴일에 침대에 누운 채로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좋은 음악을 듣는 것, 밤새워 내 공부와 관련 없는 책을 읽는 것, 햇볕 쏟아지는 코스모스길을 따라 걷는 것, 파란 하늘을 보며 잔디에 누워있는 것, 황금빛 들판에서 피크닉하는 것, 좋아하는 사람과 해변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는 것, 모두 생각만 해도 멋지고 행복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단지 「희망사항」일뿐, 나는 불행하게도 이런 일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다. 하루하루 정신없이 살다보면 파란 하늘을 보며 잔디에 누워있거나 피크닉을 가기는 커녕 그나마 연구실 창문으로 보이는 조각하늘 한 점 바라볼 여유가 없다. 해도해도 끝없이 밀리는 사무에 요새는 교수도 업적 평가제니 직업 떨어지지 않으려면 논문도 써야 하고 셀 수도 없는 회의, 연이어 찾아오는 학생들, 채점거리 등 화장실 갈 시간도 빠듯한데, 하릴없이 오솔길을 걷거나 바다를 바라볼 시간적 여유는 어림도 없다.
그래서 간혹 이렇게 빡빡하게 살아야 하나, 지치고 힘든 생각이 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사는 것보다 훨씬 행복한 삶이 어딘가에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만약 내가 할 일이 별로 없어서 오솔길을 걷거나 하루종일 바다를 바라볼 여유가 있다면 진정 행복할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긴다.
늘 자기는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이들이 시끄럽게 싸우고 직장 나가면 상사에게 야단맞고 부인은 언제나 잔소리이고 사는 게 너무 재미없었다. 드디어 그는 길을 떠나 행복의 나라고 가기로 했다. 사흘을 걷고 걸어 드디어 행복의 나라까지 가는 중간지점까지 갔고, 이제 사흘만 더 가면 행복의 나라에 도착할 터였다. 그런데 그가 숲 속에서 잠든 새 장난꾸러기 요정이 그의 구두코를 반대방향으로 돌려놓았다. 아침에 일어나 구두코가 향한 대로 다시 사흘을 걸어간 그는 드디어 행복의 나라에 도착했다. 아니 사실은 자신이 떠난 곳으로 다시 온 셈이다. 그러나 행복의 나라에서 그는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들이 있고, 아침에 나갈 직장이 있고, 늘 옆에서 지켜주는 아내가 있어 행복하고 기쁘게 살았다. 즉 행복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메시지를 주는 이야기이다.
누군가 행복의 조건은 세 가지,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희망이 있고, 무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이라고 했다. 할 일이 없을 때 진정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갑상선 기능항진증에 의한 각피 석회화증」이라는 우리 나라에서 단 한명뿐인 불치병을 앓고 있는 박진식님의 「소망」이라는 시이다.
『새벽, 겨우겨우라도 잠자리에서 일어나/ 아침 햇살을 볼 수 있기를/ 아무리 천대받는 일이라 할지라도/ 일을 할 수 있기를/ 점심에 땀 훔치며/ 퍼져버린 라면 한끼라도 먹을 수 있기를/ 저녁에는 쓴 소주 한 잔 마시며/ 집으로 돌아오는 기쁨을 느낄 수 있기를/ 타인에게는 하잘 것 없는 이 작은 소망이/ 내게 욕심이라면, 정말 욕심이라면/ 하느님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래서 전화를 해온 학생기자에게 나는 답했다.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고. 단지 그걸 몰랐을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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