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년 전 제주도에서 저질러진 끔찍한 집단학살에 대한 정부측의 진상조사보고서가 지난 10월 15일에 채택되었다. 김대중정부 출범 후 민주주의로의 이행 국면에서 과거청산에 관한 몇 가지 주목할만한 법률들이 만들어졌는데 그 중에 하나가 제주4.3법이고, 이 법에 기초하여 「4.3위원회」가 출범하였으며 몇 년간의 진통 끝에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이제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예상한 대로 몇몇 보수단체들은 제주4.3항쟁을 공산주의자들의 지령에 의한 반란으로 규정하고, 보고서가 이를 지나치게 유화적으로 다루고 있다며 정부에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나 5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똑같은 적대감으로 학살을 다시 학살하고 죽음을 다시 죽이는 이들에게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종교적 수준(?)에 이른 애국심과 불관용의 극치를 목도한다.
보고서를 폄훼하고 싶지는 않지만 보고서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보고서는 제주4.3학살을 인권의 관점에서 딱 부러지게 규정하지 않았고,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다. 아울러 마을마다 수없이 벌어진 학살극에 대해서도 많은 경우 책임소재를 규명하지 않았다. 나아가 판결문도 없는 엉터리 군사재판을 받고 처형된 사람, 수형 중에 살해된 사람 그리고 출소 후 예비검속에 의하여 살해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해답을 피하고 있다.
물론 이렇듯 애매한 보고서가 나온 이유는 제주4.3법을 낳은 정치적 역학관계에 있을 것이다. 위원회가 정치적 조건을 뛰어넘어 정의를 실현하기에는 처음부터 불가능하였다. 총리나 장관이 들어가 정부입장을 조율 대변해야 하고, 군경측이 들어가 학살이 아니라 정당한 진압이라고 우긴다면 진실이 규명될 리 없기 때문이다.
사실 제주4.3법은 책임자처벌이나 피해배상을 접어버리고 진상조사와 위령사업을 하겠다는 매우 불충분한 법이었다. 그 법에 따르면 대략 평화공원을 설립하는 일만 남아 있다. 책임자처벌이나 피해배상을 처음부터 배제하였다고 하더라도 보고서는 인권교과서로서 역할을 담당했어야 한다.
다른 나라의 진실보고서의 경우에는 책임자처벌, 피해배상 뿐만 아니라 재발방지를 위하여 국가권력, 의회, 사법부, 경찰, 군인, 정보부대, 백골단과 같은 반공식적 폭력기구 등을 어떻게 해체하고 개혁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다양한 정책적 처방을 담고 있는데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에는 이러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보고서와 별도로 간단한 건의사항이 첨부되었다고 한다.
진상조사의 궁극적인 목표가 재발방지라면 시민의 뇌리에 강한 인권의식을 뿌리내리게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과테말라 진실보고서」는 군인에게 절대적 복종책임을 부인하고 때로는 불복종을 의무화하고, 군인 역시 군복무중인 시민일 뿐이라고 규정하고, 나아가 군인에게 양심에 따른 집총거부권까지 인정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인권운동가로부터 군인이 국제인도법에 대한 기본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점도 권고하고 있다. 범죄에 동참하여 얻은 훈장은 움직일 수 없는 범죄의 증거로 남는다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현대사에서 국가권력, 군대, 경찰, 보안기관이 국가안보의 미명 하에 그러한 인권범죄를 저질러왔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4.3진상조사보고서는 매우 안이하다.
가장 끔찍스러운 대목은 죽은 자를 차별하는 행위다. 역사의 아픈 상처를 감싸안는 자세가 필요한데도 억울하게 학살당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구별하려 하고 있다. 죽은 자의 사상에 따라 학살이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제노사이드(집단살해)방지조약에는 좌익은 죽여도 된다는 논리는 찾을 수 없다. 좌익은 죽여도 된다는 야만을 청산하는 것이 우리사회에서 가장 시급하며, 인적 청산이나 악법 청산보다 더욱 중요한 「문화적 청산」 문제이다.
이 논리를 청산하지 않으면 좌익은 좌익이어서 죽고, 좌익이 아닌 자는 결국 좌익으로 몰려서 죽게 되는 상황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고서가 죽은 자의 차별을 멈추지 않는다면 더 이상 인권보고서라고 할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 인권범죄의 온상은 국가안보지상주의이다. 한국사회에서 저질러진 모든 학살의 배후에는 극우반공이데올로기가 있었다. 과거청산은 억압적 반공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과거청산은 청산이 아니라 우리가 전혀 체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문화와 독트린을 형성시키는 과정일 것이다. 과거청산을 운동이라고 부른다면 바로 새로운 인권존중의 문화를 형성하기 위한 운동이고, 우리의 일상적인 인생살이를 견딜만한 것으로 조직화하는 과정이다. 정치혁명을 만회하는 조용한 인권혁명이라고 생각한다. 제주4.3사건은 이제 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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