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먹으면 세월이 빠르다는데 정말 눈 깜짝할 사이 벌써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11월에 접어들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 생명의 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 죽음들 같습니다. 수많은 죽음들을 앞에 놓고 바라보면
죽은 사람은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고
눈은 있어도 보지를 못하며
귀는 있어도 듣지 못하고
손은 있어도 만지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걷지를 못하며
그 목구멍은 소리를 내지 못합니다』(시편 115).
사람으로서 장애란 장애는 몽땅 가진 사람이 죽은 사람입니다. 이제는 더 어쩔 수 없어 가져다 버려야할 사람이 죽은 사람입니다. 바로 사람이란 두 글자가 있는 한 사람으로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죽은 사람입니다.
「나도 죽으면 저 모양이 되겠지」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어떤 허무와 슬픔, 공포감마저 가슴이 서늘하게 스치고 지나갑니다. 마치 매서운 겨울바람이 낙엽을 후루룩 휘몰아쳐 버리는 겨울 빈 들판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의 시신을 깊이 바라보면 달라집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여유를 두고 빈 마음으로 바라보면 그렇게 허망한 것만은 아닙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화사하고 평화로운 얼굴로 누워있는 시신의 얼굴에서 희망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꼭 죽고, 죽어서 버려지고 끝인 것 같지만 그 죽음을 통해 부활의 꽃송이가 피어난다는 죽어야만 부활한다는 믿음의 음향과 향기가 죽은 이의 시신을 감싸고 피어오름을 보게 됩니다.
이제 내 앞에 놓인 죽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장애란 장애는 몽땅 가진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세례를 받고 죽었다면 「세례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형제의 몸이니 죽은 사람은 바로 나의 형제구나!」 하는 소중한 애정이 솟게 됩니다. 생전에 그가 이룩해 놓았던 일들과 의미가 사랑스럽게 펼쳐집니다. 그가 생전에 세례를 받고 성체를 영하였다면 죽은 사람은 성령의 궁전이었습니다. 주님 안에 살았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 안에 사셨으니 그리스도왕의 궁전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성전 침묵의 장엄한 성전을 앞에 대하니 경건하고 엄숙해집니다.
허나 쓸모없이 버려져야 될 듯싶어도 참으로 그냥 보내기 아까운 사람, 죽었어도 하느님의 모상을 그대로 닮은 사람이로구나, 아니 생전의 온갖 욕망 온갖 죄를 다 벗어버려서 더 깨끗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죽어서 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것 같아 보입니다.
『죽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같이 살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같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같이 부활하는구나. 도유성사도 있고, 노자성체도 있으니 외롭게 홀로 죽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같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게 틀림없다』라는 이러한 확신이 솟아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과 함께 나도 부활하리란 믿음의 확신이 훨훨 나래를 펼칩니다. 그리스도의 품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손을 잡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리란 믿음이 큰 위로와 기쁨을 실어다 줍니다.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앞에서 마냥 즐거우리라!!!
나도 이와 같이 죽어야 할 터인데 뜻대로 되지 않을까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의 준비를 하지 못하고 어떤 사고나 병마로 갑자기 죽으면 어떻게 하나, 치매에 걸려 사랑하는 모든 가족을 못 알아보고 하느님도 잊은 채 가족과 이웃에 고통만 주고 죽으면 어떻게 하나, 무서운 병으로 육체적 고통을 극심히 겪으며 하느님을 원망하며 죽으면 어떻게 하나, 이 세상에서 못내 이룬 것을 슬퍼하고 더하고 싶은 일 욕망만을 생각하고 좌절 속에 죽으면 어떻게 하나….
이러한 걱정이 앞을 가리기도 합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생각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죽음을 준비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를 아무도 모르니 하느님께 모든 것 의탁하고 『내 영혼을 당신께 맡깁니다. 자비를 베푸소서』하고 하루에 한두 번 짧은 화살기도를 바쳐야 좋을 것 같습니다. 나와 함께 하신 주님, 당신께 의탁하오니 주님과 함께 하는 나의 죽음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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