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가을의 눈빛 시린 하늘을 보며 오늘 편지 한 통을 써봅니다.
제가 며칠 전에 몇 군데의 사찰을 방문하는 가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그 여행 내내 하느님을 생각했다니까요. 가을을 만드신 당신의 뜻을 생각하면서요.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시고 나무들에게 더 큰 아름다움을 허락하신 당신의 깊은 뜻을요.
그러다 전 깨달았습니다.
『완성되었을 때 비워라. 절정일 때 떠나라!』
들판은 알곡을 털어 내고 빈 가슴으로 누워 있었고 나무는 그 열매와 잎들을 세상을 향해 또한 털어 내고 있었습니다.
삶이 무거워 늘 허덕거리는 저 같은 사람에게 당신은 꾸짖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더 깊고 처연하게 자연의 이치로 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늘 비워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새 또 차있는 욕심과 미움의 그릇, 비리다 못해 구토증을 일으키게 하는 이 세상살이의 험한 그릇을 들여다볼 때면 당신의 사랑에 저절로 무릎이 꺾여집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봄과 여름을 지어내시어 생명의 환희를 저희들에게 보여주시고 가을을 지어내시어 비워냄의 고통과 축복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곧 겨울을 맞으며 우리는 침묵과 기다림의 신비를 깨닫게 될 테지요.
하느님, 올 가을은 영원히 제 가슴에 담아두겠습니다. 이 가을에사 비로소 숨겨진 가을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은행잎으로 덮여 있는 개심사의 긴 계단을 오르며 하느님, 당신에게 살짝 묻습니다.
『왜 이리 아름답습니까? 알몸이 되어 가는 이 나무가 왜 이리 아름답습니까? 땅으로 돌아가는 이 나뭇잎이 왜 이리 아름답습니까? 온 세상에 넘쳐나는 이 가을 햇살이 왜 이리 아름답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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