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전공하는 생명윤리는 의료 행위나 생명과학 연구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주력하는 학문 분야이다. 안락사, 낙태, 뇌사, 장기이식, 생명복제 연구, 유전자 연구 등에서 발생하는 윤리적인 문제들이 여기서 주로 다루어진다.
로마 교황청은 생명윤리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인간 생명이 수정과 함께 시작된다는 입장은 낙태와 체외수정에 반대하는 전세계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의 근거가 되어 왔다.
우리 정부는 지난 10월 7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안」을 국회로 보냈다. 이 법안은 국회에 계류 중인 다른 네 개의 생명윤리 관련 법안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법률안에 불과하지만, 지난 수년간 우리 사회를 달궈온 생명윤리 논쟁에서 정부의 기본입장을 마침내 정리해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 법안은 인간 복제를 위한 체세포 복제 배아를 자궁에 착상.출산하는 행위는 금지하고 있지만, 치료를 위한 연구 목적의 배아 복제는 허용하고 있다. 또 체외수정으로 만들어진 배아 중 보존기간이 지난 잔여배아에 대해서는 불임치료법 및 피임기술 개발, 희귀 난치병 치료 등의 연구목적을 위해 이용할 수 있도록 해놓고 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정부의 이 법안에 대해 단호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한국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위원장=안명옥 주교)는 성명을 통해 체세포 핵이식에 의한 인간배아 복제는 물론 동물과 인간의 생식세포를 사용해 배아를 만드는 행위(이종간 교잡행위)와 잔여배아 활용에 대해 전면 금지를 촉구했다.
또한, 서울대교구 생명윤리위원회(위원장=박종대 교수)도 성명을 내고, 체세포 핵이식에 의한 인간 배아 복제는 어떤 경우에서도 허용되어서는 안되고 잔여배아를 파괴하는 실험이나 연구도 허용되어서는 안되며 임신을 목적으로 하는 체외수정을 위해 인간 배아를 생성하는 행위도 엄격히 금지돼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정부 법안과 별도로 가톨릭의 입장을 대변하는 법안이 김덕규 의원(한나라당)의 의원입법 형태로 지난 3월 국회에 제출, 현재 상임위에 계류돼 있는 상태이다.
이처럼 생명윤리법안에 담을 내용에 관해 한국 가톨릭교회는 정부와 상당한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번 생명윤리법안 제정과정에서 한국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가르침을 법률에 관철시키지 못했던 지난 73년과 86년의 모자보건법 제.개정 과정에서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국내의 시민단체와 여성계가 생명윤리 법안의 내용에 관해 가톨릭의 입장에 동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단체들도 한목소리로 체세포 핵이식에 의한 배아복제와 이종간 교잡행위를 반대하고 있다. 다만 잔여배아를 연구용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이 단체들이 다소 융통성 있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사회적 관심사에 관해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계.시민단체.여성계가 통일된 의견을 모으는 건 드문 일이다. 이들은 2001년부터 「조속한 생명윤리기본법 제정을 위한 공동캠페인단」을 구성하여 공동보조를 취해왔다. 여기에 참여하고 있는 단체들은 가톨릭, 기독교, 불교의 종교 관련 단체로부터 여성계, 농업운동단체, 환경단체, 동물권단체, 보건의료단체, 시민단체에 이르기까지 그 수가 무려 69개나 된다.
필자는 이러한 현상이 우리 사회 생명윤리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는 하나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종교계.시민단체.여성계는 각기 주장과 지향이 독특한 까닭에 어떤 하나의 사회적 이슈에 관해 입장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흔하다.
일례로 미국의 종교계와 여성계는 낙태 찬반논쟁에서 양극단에 서서 대립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생명윤리 법안의 내용에 관해서 한목소리를 모은 건 무슨 까닭일까?
이들의 공통된 염려는 우리 사회 전반에 생명 존중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고, 이러한 공동의 위기의식이 서로 다른 색깔의 여러 단체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는 것이리라.
이러한 협력은 적어도 생명윤리법안의 내용이 확정되어 국회를 통과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 우리는 생명윤리법안을 매개로 하나의 사회적 실험을 거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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