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도쿄 소피아(上智)대학에 계신 은사 클라우스 리젠후버 신부님으로부터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그분이 소장으로 계시는 「중세사상연구소」에서 번역 감수한 『중세사상원전집성(中世思想原典集成)』이 올해 「일본번역출판문화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지난 2002년 9월 17일, 11년여 년 만에 전권 20권을 완결한 직후 일본의 거의 모든 신문이 이 쾌거를 전하고 있었기에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으나, 독일 출신의 한 예수회 신부가 자신의 모든 정력을 쏟아, 일본이라는 지극히 비그리스도교적인 국가에서 서양조차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일을 완수하였다는 사실이 내게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일본 유수의 출판사 헤이본샤(平凡社)로부터 1992년 2월부터 간행된 이 총서는, 2세기 고대 그리스도교의 교부시대부터 17세기의 근세 초기에 이르기까지 1500년간에 걸친 중세사상의 발전을 그 원전으로부터 번역한 엄청난 대사업이었다. 각 시대의 저자 226명의 주요 저작 335편을 번역하기 위해서 전문가 168명이 동원되었다.
각권 평균 900여쪽, 전권 18000쪽에 달하는 이 방대한 총서는 일본 초역일 뿐 아니라 유럽 근대어로도 아직 번역되지 않은 「세계 초역」을 90편이나 담고 있다. 원전은 그리스어 라틴어가 90%를 차지하나 그밖에도 아랍어, 옛 영어, 옛 프랑스어, 옛 독일어, 옛 이탈리아어, 옛 화란어 등이 있는데 그 전문학자들을 찾는 것이 가장 큰일이라고 여겨졌지만, 놀랍게도 거기에는 반드시 젊은 연구자가 있었다.
중세는 흔히 암흑시대라고 교과서에서 획일적으로 가르치고 있지만, 철학, 신학, 신비사상, 교육론, 자연학, 언어론 등 현대 유럽의 정신적 기초가 다져진 것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인간과 신과의 관계가 그지없이 풍요로웠던 중세라고 하는 세계였다. 출판사의 편집책임자는 『좋은 책은 반드시 팔린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래서 장정과 조판도 전문서적이 아닌 일반서적으로 하였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국내의 한 출판사가 이 일본판 「중세사상원전집성」을 우리말로 옮기려고 헤이본샤와 가계약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번역 책임자로 필자를 선정한 사실이 판권을 소유하고 있는 중세사상연구소에도 알려지면서 리젠후버 신부님은 지난 여름 필자와 만났을 때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하셨다. 그러나 그 이후 이 우리말 번역 사업은 조금도 진척이 되고 있지 않다. 국내출판사가 중역이라도 해보겠다는 야심만만한 계획을 세워보았지만, 세간에서 왜 하필이면 일본어냐는 비아냥거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방대한 분량을 무모하게 출판해보았자 큰 손해만 볼 것이라는 경제적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나는 한국교회가 이 출판사업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할 때라고 본다. 우선은 이 사업을 위해 대학의 연구소가 그 중심이 되어야하는데 현재 우리나라 가톨릭계 대학들은 그럴 형편이 못된다. 가톨릭대학교에 「중세사상연구소」나 서강대학교에 「그리스도교문화연구소」와 같은 기본적인 연구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 고전을 번역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태부족한 게 현실이다.
불교는 이미 1962년부터 한글 대장경 간행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의하여, 1964년 동국대학교에 부설 동국역경원을 설치하고, 1965년부터 매년 8권씩 간행하여, 2000년말까지 36년간 모두 313권을 펴냈다. 그리고는 한글 대장경의 전산화 사업을 위해 문화부로부터 10년간 40억을 지원받아 2010년까지 이를 완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번역 책임자였던 운허 스님은 평소에 해인사에 팔만사천장이나 되는 보물이 쌓여있지만 한문으로 되어있어 일반 대중에게는 나무토막에 불과하니, 그것을 대중에게 좀더 가까이 갖다 주어 무가보(無價寶)의 구실을 하게하고 싶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21세기는 교회에서도 영성과 문화의 세기라고 말들은 하지만, 현대 사회는 갈수록 그 영성은 평면화되고, 문화는 그 유치한 속도만을 자랑하고 있다. 16세기 초, 종교개혁으로 인해 교회가 분열을 피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혹시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적 개혁 프로그램이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면 그 분열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한스 큉은 말한다. 다시 500년이 지난 21세기 초, 제2의 종교개혁의 전야와도 같은 오늘날, 그리스도교 고전의 번역 사업은 한국교회라는 방주의 자기 침몰을 막는 최선의 개혁 프로그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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