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7만명이 넘는 의사들이 있고, 이들을 회원으로 하는 대한의사협회가 있다. 이 협회는 2001년 11월 의료행위의 규범을 자세히 규정한 193개 항의 「의사윤리지침」을 공포한 바 있다. 이 지침이 아직 진료 현장에서 널리 쓰이고 있진 않지만 지침의 30조 2항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의학적으로 회생의 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자율적 결정이나 그것에 준하는 가족 등 대리인의 판단에 의하여 환자나 그 대리인이 생명유지치료를 비롯한 진료의 중단이나 퇴원을 문서로 요구하는 경우 의사가 그러한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은 허용 된다』
이 조항은 2001년 11월과 이듬해 5월 두 차례에 걸쳐 언론의 뭇매를 맞았다. 당시 일간지에 실렸던 기사들의 제목을 살펴보면 그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데 「사망 임박한 환자 무의미한 치료 거절」, 「임종환자 치료중단 지침 복지부 「실정법에 저촉」」, 「소극적 안락사 논란 재연」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기사의 상당 부분은 오해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문제의 조항은 다른 나라의 의사윤리지침에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서 대한의사협회는 그렇게 주장할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가령 미국의사협회 의료윤리지침은 의미 없는 치료에 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의사는 전문적으로 판단할 때 계속 치료하더라도 환자에게 이득이 될 것 같지 않은 경우에 치료를 지속해야 할 윤리적 의무를 가지지 않는다. 단지 환자가 요구한다는 이유만으로 치료를 계속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 「의사윤리지침」에 대한 오해는 문제의 조항이 소극적 안락사를 허용하는 것으로 잘못 읽은 데서 비롯되었다. 의료진이 임종이 임박한 환자의 치료를 중단한다고 해서 모두 안락사가 되는 건 아니다.
치료 중단은 호스피스 완화치료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호스피스적 보살핌이 안락사의 윤리적인 대안이라고 믿는 필자는 치료 중단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논란이 앞으로 호스피스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호스피스란 죽음을 앞둔 말기환자가 남은 여생동안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높은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 영적인 돌봄을 통해 삶의 마지막 순간을 평안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총체적인 접근법이다.
호스피스는 말기환자의 존엄사 권리와 환자의 삶의 질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소극적 안락사와 일견 유사해 보이지만, 환자의 죽음을 결코 의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안락사와 분명히 구분된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이미 1960년대 중반 국내에 호스피스를 처음으로 도입하였고, 1988년 강남성모병원에 호스피스 병동을 개설하는 등 국내 가톨릭계 병원의 호스피스 운동을 꾸준히 지원해왔다.
최근 들어서는 호스피스 활동에 참여하는 개신교 단체 및 병원의 숫자도 늘고 있다. 가톨릭 및 개신교회가 안락사에 강하게 반대하는 반면, 호스피스 활동에 관해서는 의료계와 종교계 사이에 어떠한 갈등도 찾아볼 수 없다.
호스피스는 의료 재정을 운용하는 정부에게도 매력적인 제도이다. 우리나라 의정 당국은 임종환자의 안락사를 금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건강보험 재정 악화를 우려한 나머지 회복 불가능한 환자의 의료비를 삭감하고 있다.
호스피스는 적극적인 치료 대신 통증 관리 등 완화 치료를 주로 하므로 부족한 의료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나라 암 환자의 사망 직전 1개월간 진료비가 1년간 전체 진료비의 31%를 차지할 정도로 사망 직전에 진료가 집중되고 있는 의료 현실을 고려할 때, 호스피스의 활성화를 통해 우리 정부는 의료 재정을 크게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호스피스의 건강보험급여가 확대되는 현상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요모조모 따져볼 때 결론은 호스피스다. 우리나라에서 기왕에 시작된 임종환자의 치료중단 논쟁이 큰 사회적 비용의 희생 없이 생산적인 논의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호스피스에 초점을 맞추는 게 바람직하다.
선진 외국의 선례를 볼 때, 안락사 허용을 둘러싼 논란을 우리 사회도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때가 언젠가는 오겠지만 지금은 아직 아니라고 필자는 믿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락사 논쟁이 아니라 안락사의 건전한 대안인 호스피스에 대한 교육과 참여를 확대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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