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출판계의 「올해의 인물」은 단연 해부학자이자 뇌과학자인 요로 타케시 교수이다. 그는 올해 4권의 신서(新書 : B6판에 가까운 비교적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작은 책)를 냈는데 그중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을 논한 「바보의 벽」은 벌써 200만부를 돌파하고 있다.
요로 교수가 말하는 「바보의 벽」이란 무엇보다도 『자기동일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나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는 뇌의 활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보통 사람들은 『바닥을 치면, 그 다음은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고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그 바닥을 파는 수도 있는 것이다』
「바보의 벽」이 가리키는 것은 먼저 이러한 고정적인 가치관의 타파이다. 나는 첫 피정을 하고 난 뒤의 체험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놀라우리만치 세상이 전혀 다른 세계로 변해있었다. 그때 지도신부님은 웃으며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라 네가 변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좀체 믿어지지가 않았다. 만나기로 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친구 또한 말했다. 『목소리가 달라진 것 같아』 달라지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요로 교수는 「바보의 벽」은 일종의 일원론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슬람세계와 미국 간의 전쟁도 유일신 종교 내의 원리주의자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정보, 어떤 신조가 한 사람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현실 즉 무한대가 되는 것이 바로 원리주의이다.
「바보의 벽」이 지적하고 있는 또 하나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일원론적 뇌화사회(腦化社會)에서 다원론적 신체사회(身體社會)로의 이행이다. 베르베르의 「나무」에 나오는 「완전한 은둔자」를 읽어보자. 거기엔 근대화, 도시화로 인해 경직된 뇌화사회의 비참한 종말이 엽기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네 안에는 모든 것이 이미 다 들어있다』 그리하여 유명한 의사 루블레 박사는 육체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정신을 위해, 자신의 뇌만을 따로 떼어내어 영양액 속에 보존하는 수술을 받는다. 그는 뇌로만 남음으로써 굉장한 정신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뇌는 무심한 아이들에 의해 표본병에서 꺼내져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그리하여 허망하게 개의 먹이가 되고 만다. 개에게는 그 뇌가 한낱 고깃덩어리였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개는 식사를 끝내고 가볍게 트림을 하였다. 그리하여 귀스타브 루블레의 사유 중에서 아직 남아있던 것들이 모두 저녁 공기 속으로 흩어져버렸다』
근대적 개인은 자신을 불변의 정보로 규정했었다. 자기에게는 변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그러한 개성은 「뇌」가 아니라 「신체」 안에 깃들어있다는 것이 현대인의 자각이었다.
1995년 나는 도쿄에서 수술을 받고 회복 중에 있었는데, 그때 소위 「옴 진리교 사건」(지하철 사린 사건)이 터졌다. 내가 입원한 병원으로도 수백 명이 실려 왔다. 그때 가장 궁금했던 것은, 왜 똑똑한 젊은이들이 멍청하게 생긴 장님 교주 아사하라(麻原)를 추종했는가였다. 요로 교수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자신의 몸과 대면해본 적이 없는 뇌화사회의 젊은이들에게 있어, 아사하라의 요가 수행을 통한 제자들의 신체에 대한 예언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올해 졸저 「감각과 초월」을 통해 「신체의 복권」을 신학적 미학의 핵심 문제로 다루어보았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몸치(肉痴)가 곧 영치(靈痴)」라는 것이다. 얼마 전 일본 주간지 「아에라」는 공전의 불교 붐을 특집으로 다룬 적이 있다. 여기서도 요로 교수는 신체와 뇌의 관계를 통해 불교회귀 현상을 읽고 있다. 그는 뇌의 지나친 지배에 대한 반동으로 신체성에로의 회귀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좌선이란 뇌를 바보로 만드는 것이다』 『불교는 신체를 의식하는 것이다』 『자신의 호흡을 의식하자 신체 안에 우주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하는 말들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 문제는 불교가 아주 사적인 불교(私佛敎)로 이행해간다는 것이다.
한 스님의 말대로 『언어가 사라진 세계에서 종교는 감각적인 것으로 단순화되어갈 수밖에 없다. 그것으로라도 구원되는 사람이 있다면 부정할 수 없지만, 감각적인 종교가 지니는 위험도 느껴진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지금 많은 가톨릭신자들이 산사(山寺) 체험을 하고 있는 것도, 교회나 사찰이 콘서트나 연극 등의 공연장으로서 주목을 받고 있는 것도 다 이와 같은 맥락 안에서 이해된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