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해는 참으로 어지러웠다. 언론들이 한 해를 결산하며 모아놓은 「세태를 풍자하는 낱말」들을 대하자니 너무나 그럴듯하여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태백」이 20대의 태반이 백수라는 의미의 준말로 쓰인다니 각박한 경기침체를 나타내는 말로는 그만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네 상식하고는 거리가 먼 「차떼기」란 말에서는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차떼기 무대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직업이나 학벌 등 배경을 보자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이 더욱 돋보이기도 한다. 하나 더,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 질서가 자리잡게 되면서 생겨난 새로운 사태인 「신빈곤」이란 말도 우리 사회의 심각한 한 단면이라 하겠다.
상식(常識 common sense)이란 「전문적인 지식이 아니고 정상적인 일반인이 가지고 있거나 또는 가지고 있어야 할 일반적인 지식, 이해력, 판단력 및 사리분별」을 일컫는다고 백과사전은 풀이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부(?) 몰지각한 정치인들이 저지른 차떼기에 분노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더 무서운 일은 언제부터인가 많은 사람들이 「관행」이란 이름으로 상식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이다. 또 상식에서 벗어난 규모가 남보다는 적다 하여 아무런 부담도 느끼지 않는 것이다. 물론 구체적인 사안에서는 그 규모에 따라서 법의 심판에 따른 양형이 다르기는 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것은 무디어진 우리 마음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제대로 있기를 소망한다. 그것은 바로 상식으로 사는 사회를 일컬음이다. 그리고 그 첫째로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대접받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조금 더 편하고 풍요롭게 살겠다며 사람이기를 스스로 포기하기 시작했다.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삶의 가치를 숫자로 계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나라보다 소위 국민총생산이 보잘것없는 가난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다고 느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부를 나타내는 숫자의 마력 앞에 맥을 못 춘다.
일반적으로 물량을 따지다 보면 남보다 앞서려 하고, 그런 과정에서 상식과는 거리가 먼 무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선의의 경쟁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1등만이 값진 것으로 대접받기 때문에 그걸 이뤄내기 위해서 상식에 어긋나는 방법으로 1등을 하려드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1등이 아니면 안되는 것은 대통령선거도 그렇고, 국회의원 총선거도 그러하다. 이것 또한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 질서의 한 모습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데서 나온 부작용의 하나가 바로 차떼기다.
교육은 한 나라의 백년대계가 달린 것이니 늘상 새롭게 점검해보아야 한다. 지난번에도 말했다시피 오늘 우리나라 교육의 가장 큰 문제, 곧 병인은 교육에 경제논리를 도입한 것이다. 참 교육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도 7차교육과정을 펴면서부터 학교를 시장처럼 만들어가고 있다. 시장에서는 항상 손님이 왕이고, 그러다보니 손님의 목소리만 커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아직은 학생들의 선택을 충분하게 존중할 수 없는 게 학교의 현실이다. 그런데도, 한 예를 들자면, 대학입시에서 「아랍어」를 선택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러면 고등학교에서는 어쩌란 말인가! 이런 실정인데도 굳이 「수요자 중심 교육」이란 말을 해야 하는 건가! 다행히도 새 교육과정을 펴던 장관이 다시 이 나라의 교육책임자가 되었다. 그동안의 진행과정에서 무엇이 문제였던가를 다시 한 번 점검해보았으면 좋겠다.
또 새해가 시작되고 있다. 새 천년기를 시작하면서 마음이 부풀었던 게 엊그제인데, 몇 해가 지났다. 그런데 우리에게 달라지고 나아진 게 있던가? 있다. 교회 안밖에서 「생명」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나눔도 많아졌다. 또 국민들의 의식도 깨어나고 있다. 그래서인지 차떼기 비리 등으로 나타난 시대의 징표가 희망의 길잡이로 보인다. 마침 서울대교구 사회사목담당 교구장대리 김운회 주교는 한국 사회의 「신빈곤」 문제에 대한 특별담화에서 『신앙인들은 검소한 경제생활로 청빈의 덕목을 증거하도록 힘써야한다』고 당부하고 있다.
신앙인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상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복음이 가르치는 세 가지 덕, 곧 청빈, 정결, 순명이리라. 고승들이 우리 곁을 떠나 열반에 들며 남기는 것이 있다. 그런데 심오한 열반게의 의미는 쉽게 잊혀지는데, 누더기 가사에 몽당연필이 오래토록 맘을 흔드는 연유가 무엇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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