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성탄 카드와 신년 카드가 제법 쌓였다. 거의 은둔하다시피 하는 나를 안부하는 지인들의 마음씀이 그저 고맙고 소중할 따름이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가도 이 정성어린 카드들이 나와 함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십 년 가까운 세월, 하숙집을 전전하면서 나는 버리는 법을 익혀야 했다. 자고, 먹고, 입고, 글을 짓는 모든 도구들이 방 한 칸에 다 수용되어야 하기에 나는 많은 것들을 버리면서 세월을 지탱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거처를 옮길 때마다 나는 냉정한 눈길로 버려선 안 될 것과, 버릴 것을 정했다. 글쟁이라는 직업상 책들을 악착같이 챙기고, 주로 옷가지와 잡동사니를 내다버리는 편이다. 그리고 편지함도 잡동사니의 대열에 끼어 어느 밤거리로 내몰리고 만다.
이사 전날 밤 길거리에 두고 온 편지들이 실은 지인들의 마음임을 알기에, 나는 이사 당일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 마음들을 모두 떠안고는 한칸살이를 견뎌내지 못할 거라 자위해보아도 마음 한구석에 통증이 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더해가고 정 없는 세상에 함몰되는 위기를 느끼면서 나는 그 편지함들의 가치를 새삼 절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혜화동에, 신촌에, 왕십리에, 상도동에 두고 온 마음들을 추억하는 일은 죄스럽기 그지없다. 지인들에게 미안하고, 사람 사이의 정(情)으로 세상에 오시는 예수님께 죄송하다.
주님, 사람들의 필체로 화(化)하여 제 적적한 크리스마스와 가난한 겨울날을 어루만졌던 당신의 사랑이 그 편지함에 쌓여 버려진 건 아닌지요. 어둑한 길거리에 편지함을 내버리고 도망치듯 1톤 용달을 타고 새 거처로 와버린 저의 황황한 걸음 뒤에, 주님, 행여 당신이 서 계셨던 건 아닌지요. 어느덧 새 편지함에 주님의 사랑을 꼭 닮은 마음들이 수북하니 들어찼다. 나는 이 마음들을 얼마나 오랫동안 보듬고 갈 수 있을까. 숱한 마음들을 내버리고 지켜온 책들을 바라보는 내 눈길이 오늘따라 무연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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