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향을 사이에 두고 사람을 마주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하여 나는 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는 자리에선 커피 대신 다른 마실 거리를 택하는 편이다. 지난 연말에 위장병을 얻은 후로는 담뿍 정을 주어도 상관없는 사람을 만나도 커피를 주문하지 못한다. 그러나 위장병 사실을 숨기면서까지 함께 커피를 마셔야 할 친구가 있다.
대학 졸업 후 몇 해 동안 그 친구와 나는 공공도서관 열람실을 전전하며 세월을 죽였다. 취직할 생각 말고 속히 수녀원에 들어가라는 가족들의 채근에 쫓겨온 친구와, 소설나부랭이는 집어치우고 시집갈 궁리나 하라는 가족들의 시선을 피해온 나는 자판기 커피를 낙으로 삼으며 청년실업자 반열에 들었다. 옹색한 환경과 주변인들의 야유는 우리에게 적잖은 피로감을 주었으나 우리는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소설 「토지」를 필사하고, 하릴없이 경동 시장을 배회하며 사람 구경을 하던 시절 내내 서울 도심 곳곳의 자판기 커피는 내 벗이었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친구는 자신의 형편이 나아지면 한 달에 한 번씩 근사한 곳에서 커피를 사주겠노라 했다.
취직을 한 후 친구는 약속을 지켰다. 자신이 다녀본 커피전문점 가운데 생크림이 가장 맛있다는 곳으로 날 데려가 카페모카를 사주기 시작한 게 이제는 우리 사이의 전통이 되었다. 한번쯤 나도 커피를 사게 해달라고 청하여도 친구는 완강히 거부한다. 말인즉, 커피 값은 자기 고유의 권한이란다.
친구네 가족들은 여전히 그녀를 수도자로 만들고자 묵주 알을 돌리고 있고, 나는 가시적인 성과가 없는 소설나부랭이 탓에 부모형제의 눈밖에 난 처지지만 그녀와 나 사이를 채우는 커피 향은 그간의 시름을 씻어주기에 족하다. 며칠 있으면 친구와 커피를 마시는 날이다.
주님, 제 오랜 벗이 부리는 4천원의 사치에 마음껏 환호할 수 있도록 그날만큼은 제 위장병을 잠재워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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