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볼트의 희곡 「사계절의 사나이」에는, 아버지 토머스 모어와 딸 마가렛 사이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아버지,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나요? 맹세란 그저 말뿐이에요. 그들이 원하는 걸 말해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사셔야만 해요』
『그런데 얘야, 네가 만일 물 컵을 들고 있다고 해보렴. 그것을 네가 쥐고 있는 한 그 물 컵은 그대로 있지. 하지만 네가 그것을 놓는 순간 물 컵은 땅에 떨어지고 말거야. 한 남자도 이와 같단다. 한 남자는 맹세 안에 자신을 쥐고 있지. 사람들은 의미도 없는 말을 함부로 내뱉지만, 내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너를 너무나도 사랑하기 있기 때문이란다』
영국의 왕세자비 다이애너는 지난 97년 여름 파리에서 애인과 함께 끔찍한 교통사고로 죽었다. 「세기의 결혼」이라고도 불릴 만큼 성대했던 한 왕실의 결혼은 그렇게 지극히 통속적으로 치정 살인극이 아닐까 하는 의혹조차 받으며 종말을 고했다. 부러움 가운데 온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출발하였던 왕실의 결혼 생활에 언제 어디서부터 파탄이 찾아온 것일까?
가톨릭신자로서 이혼을 경험한 적이 있는, 나의 가장 존경해마지 않는 선생님 가운데 한분은, 자신이 쓴 「사랑론」이라는 글에서 『사랑이 성장하지 않는 부부관계는 중단하는 것이 낫다』라고 적고 있어 내게 적지 않은 충격을 준 적이 있다. 부부생활을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나, 마찬가지 공동생활인 수도 생활 스무 해를 앞두고 어렴풋이나마 알 것도 같다.
내게 있어서도 「종신서원」(예수회에서는 영구서원 perpetual vows 이라고 부른다)이 깨질 뻔한 몇 번의 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때마다 하느님의 도우심과 나를 기억하고 계신 분들의 기도 덕분에 무사히 그 위기들은 넘어갔다. 나도 처음에는 하느님을 전심전령(全心全靈)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다.
물론 그러하였기에 수도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살면 살수록 절실히 느끼는 것은 나는 그렇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는 죄인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사실 수련 시절 초기에 이미 나는 이 사실에 절망했고 따라서 언제든 때가 되면 수도 생활을 떠날 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내 주위에서도 불안한 마음으로 나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러한 나를 하느님께서는 서원하도록 허락하셨고 지금도 여전히 당신 손 안에 쥐고 계시다.
왜 하느님께서는 내가 당신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나를 쥐고 계시는 것일까? 내가 당신을 먼저 놓기 전까지는 당신께서 먼저 나를 놓을 수 없다는 신의를 지키시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토머스 모어의 말대로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일까?
나는 요즘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있다고는 고백하지 못한다. 그저 비어있는 잔 같은 내 마음을, 처음 수도 생활을 갈망하던 때의 그 순수한 사랑으로 하느님께서 다시 가득 채워주시기만을 빌 뿐이다. 그래서 지금 비록 잔은 비어있지만 나는 그 빈 잔을 꼭 붙들고 있다. 그것이 서원에 대한 나의 신의이다.
이제 곧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50%를 넘어 세계 1위를 하게 되리라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다. 하긴 세속적인 삶의 정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대통령도 취임식 때의 약속은 다 어디로 가고 1년도 못되어 『못해먹겠다』고 하는 판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설령 못해먹을 지경이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그것이 자신이 취임식 때 국민들 앞에서 했던 선서에 대한 최소한의 신의이기 때문이다. 못해먹겠기는 부부들도 마찬가지이고, 한 수도회와 한 대학의 일원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나도 마찬가지이다.
얼마 전 동네 안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나는 한 노부부를 오랫동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 적이 있다. 중풍으로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를 할아버지가 부축해가며 내려가고 있었다.
오랜 세월이 물들인 그분들의 은발이 『삶은 신의다』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 노부부의 머리 너머로 한강에서는 노을이 눈부시게 지고 있었다. 일출과 일몰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은 하루도 거르는 일 없이 뜨고 지는 바로 그 신의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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