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는 날이면 내 마음은 남도의 어느 한적한 산골짜기에 머문다. 몇 해 전 아버지는 할머니의 주검을 집안 선산이 아닌 그곳 산비탈에 묻었다.
1905년 장 폴 사르트르가 세상에 나던 해에 태어난 할머니는 1995년 임마누엘 레비나스가 죽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지성들과 같은 시대를 공유하며 격변의 20세기를 몸소 걸어온 할머니는, 그러나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인이었다.
당신의 소녀기에 물려받은 시대의 가치관과 편견을 조금도 거스르지 않고 살아낸 그는 한때는 순종적인 아내요 며느리였고, 아들이 장성한 후로는 혹독한 시어머니였다.
타고난 살림꾼이었던 할머니는 가부장적인 질서 안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았고 늘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세상과 마지막 대면을 하던 날, 할머니는 아버지를 불러 의외의 유언을 남겼다.
『나를 네 아버지 곁에 묻지 말아다오』 며칠 동안 잠을 못 이루고 번민하던 아버지는 결국 할머니의 주검을 지금의 그곳 산비탈에 묻었다.
대세는 받았지만 평생을 민간정서와 민간신앙에 따라 살았던 할머니는 죽어서 선산에 묻히면 다시 시집살이를 해야 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할아버지와 증조부, 증조모는 할머니에게 다시 만나고픈 사람이 아니라 매서운 상전들이었다. 할머니의 주검을 산비탈에 묻은 날 아버지는 밤새 오열했다. 이웃할 무덤 하나 없는 그곳에, 볕마저 인색한 그곳에 어머니를 뉘여 놓은 아버지의 울음에 우리도 따라 울었다. 할머니의 무덤가에 과실이 영글지 않는 겨울철이면 저리도 하얀 눈이 날리어 우리의 마음을 그곳으로 데려간다.
하느님은 할머니의 선택을 무지한 인간의 괜한 두려움이라고 나무라지 않으실 것이다. 분명 그분은 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고 어루만져주셨으리라. 꽃도 열매도 없는 겨울이면 할머니의 무덤가에 눈꽃을 피워두고 우리를 부르시는 그 다정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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