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엔 백석의 시처럼 『푹푹』 눈이 날렸다. 밤새 쌓인 눈을 보고자 이른 아침 공원에 나섰을 때, 나는 뜻밖에도 봄내음과 마주쳤다. 철쭉, 개나리, 즐비한 가로수, 누구하나 신록을 보여준 이가 없음에도 나는 분명 봄을 보았다. 오리털 점퍼를 입고 털모자까지 눌러쓴 내가 『봄이다!』하자 곁에 있던 친구는 실소했다.
어릴 적 고향집에서도 나는 식구 중에 가장 일찍 봄을 맞았다. 꽃샘추위도 닥치지 않은, 아직 매서운 겨울 복판에서 나는 번번이 봄을 느끼고 들판으로 나갔다. 삘기도, 쑥도 내 성급함을 나무라듯 땅속에 은신하고 있었으나 나는 허허로운 들판에 우뚝 서서 발을 탕탕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삘기를 내놔! 버들강아지를 내놔! 진달래를 내놔!
봄을 느끼고 들판으로 뛰쳐나온 이는 나 하나가 아니었다. 우리 동네 만수아저씨는 겨우내 모아두었던 가축분을 부지런히 들판으로 날랐다. 머잖아 땅에서 냉기가 가시면 만수아저씨는 들판에 구덩이를 파고 그것을 묻을 터였다. 그 「똥구덩이」 위에 호박씨가 뿌려지고, 오이며 가지 씨앗이 뿌려져서, 그 열매들은 여름내 시골 밥상의 주빈으로 자리할 터였다. 가축분 냄새 진동하는 들판을 쏘다니다 돌아오면 할머니도 흔쾌히 봄이 왔음을 시인했다. 『쯧쯧! 봄볕에 까맣게 탔구나!』
나는 더 이상 들판에 서서 발을 구르는 어린 계집아이가 아니다. 봄이 왔다고, 내 편을 들어줄 이가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직 동면중인 개구리를 흔들어 깨울 수도 없는 일. 그 옛날 내편이었던, 고향 들녘의 만수아저씨는 몇 해 전 하느님 곁으로 돌아갔다.
우울한 산보를 끝내고 다시 아파트로 들어선다. 구두에 묻은 흙을 벗겨내느라 예닐곱 살 계집아이처럼 고집스레 발을 탕탕거렸다. 그 순간 내 곁을 지나가던 젊은 여인의 진홍빛 스카프가 나풀거렸다. 봄은 그녀에게도 스며들었는가…. 나는 오래오래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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